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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720
한자 洪命熹
이칭/별칭 가인(假人),가인(可人),벽초(碧初),순유(舜兪)
분야 역사/근현대,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진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8년 7월 3일연표보기 - 홍명희 생
수학 시기/일시 1902년 - 홍명희 중교의숙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05년 - 홍명희 중교의숙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06년 - 홍명희 일본 도쿄 도요 상업학교 예과 2학년에 편입
수학 시기/일시 1907년 - 홍명희 다이세이 중학교 3학년에 편입
수학 시기/일시 1910년 2월 - 홍명희 귀국
활동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홍명희 『소년』에 번역 문학 작품 기고
몰년 시기/일시 1968년 3월 5일연표보기 - 홍명희 졸
추모 시기/일시 1998년 - 홍명희 괴산 제월리에 ‘벽초 홍명희 문학비’ 건립
출생지 홍명희 출생지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
거주|이주지 홍명희 거주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244-1[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 244]
묘소 평양 애국 열사릉 - 평양시 형제산 구역 신미동
성격 소설가
성별
대표 경력 『시대 일보』 사장|『동아 일보』 편집국장

[정의]

일제 강점기 말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 거주하였던 소설가.

[개설]

홍명희(洪命熹)[1888~1968]는 1888년 7월 3일에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순유(舜兪), 호는 가인(假人, 可人), 벽초(碧初)이다. 출생 이후부터 청년 시절까지 괴산에서 거주하였으며, 장년이 된 1921년에 상경한 이후에는 줄곧 서울에 살았다. 그러다가 1939년 말에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으로 이주하여,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창동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당시의 집은 6·25 전쟁으로 불타버렸다. 일제 강점기 최대의 역사 소설의 하나로 손꼽히는 『임꺽정』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 소설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활동 사항]

어린 시절에 한학을 수학하다가 일본에 유학한 홍명희는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 홍명희는 『소년』지에 폴란드 시인 니에모예프스키(A. Niemojewski)의 산문시 「사랑」을 번역·소개하는 등, 최남선·이광수와 함께 신문학 운동에 일조하였다. 1912년에 출국하여 상하이[上海]에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였으며, 싱가포르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다가 1918년에 귀국하였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충청북도 최초의 만세 시위를 주도한 관계로 투옥되어 1년여 동안 수감되었다.

출옥 후에는 서울로 이주하여 한때 휘문 학교와 경신 학교 교사, 조선 도서 주식회사 전무로 근무하였으며, 1924년 『동아 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듬해 『시대 일보』로 옮겨, 1926년에 『시대 일보』 사장이 되었으며, 그해 『시대 일보』가 경영난으로 폐간되자 정주 오산 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한편 신사상 연구회, 화요회, 조선 사정 조사 연구회 등 사상 운동 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것을 기반으로 1927년 신간회의 결성을 주도하여, 조직부 총무 관사직을 역임하였다.

1929년 12월에는 신간회 민중 대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만 2년여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28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 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하여 일약 인기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일제가 친일 협력을 강요하던 1940년대 초반, 홍명희는 일제 당국에 맞서 일체의 사회 활동을 중단하고, 창동에서 지조를 지키며 은둔 생활을 하였다.

8·15 광복 후인 1946년에 조선 문학가 동맹 중앙 집행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47년에 민주 독립당을 창당하고 당 대표로 취임하고, 그해 12월 민족 자주 연맹을 결성하여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 4월에 평양에서 열린 남북 연석회의에 참가한 후에 홍명희는 귀환하지 않고 북에 잔류하였다. 북한에서 내각 부수상, 조선 최고 인민 회의 상임 위원회 부위원장, 과학원 원장, 조국 평화 통일 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술 및 작품]

홍명희의 대표작인 『임꺽정』은 1928년 11월부터 『조선 일보』에 연재되었다. 그 후 홍명희는 투옥이나 신병 등의 이유로 몇 차례 중단을 겪으면서도, 1940년까지 10여 년에 걸쳐 『임꺽정』을 연재하였으며, 『조선 일보』가 폐간하자 1940년에 『조광』으로 지면을 옮겨 한 차례 게재되었으나 말미의 일부가 미완성인 채 중단되었다. 연재 당시의 순서에 의하면 「봉단편」·「피장편」·「양반편」·「의형제편」·「화적편」의 5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중 「의형제편」과 「화적편」이 조선 일보사 출판부[1939~1940]에서 4권으로, 을유 문화사에서 6권[1948]으로 간행되었으며, 사계절사[1991]에서 전편이 10권의 교정본으로 출간되었다.

조선 중기에 지방의 도둑으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그 행적이 단편적으로 기술되기도 한 임꺽정의 이야기를 방대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식민지 현실의 모순 그 자체보다도, 봉건 제도의 모순 아래서 고통 받는 하층민들의 일상적인 삶과 투쟁을 그리는 데 치중하고 있다. 이를 위해 조선 시대의 풍속·제도·언어 등을 탁월하게 재현하여 민족 문학적 개성을 잘 살리고 있으며, 다양한 신분의 하층민들을 등장시켜 각기 개성 있는 성격으로 형상화하며, 일상적인 장면들을 중심으로 극도로 정밀한 세부 묘사를 보여 주고 있다.

민중사를 중심으로 한 사실주의적 역사 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황석영의 『장길산』을 비롯한 광복 이후의 역사 소설들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임꺽정』 이외에도 홍명희는 언론사에 재직하는 동안, 동서고금의 이색적인 지식을 소개한 칼럼을 연재하였으며, 이를 모아 1926년에 조선 도서 주식회사에서 『학창산화(學窓散話)』를 간행하였다. 또한 프로 문학 단체 카프(KAPF)의 기관지에 해당하는 『문예 운동』 창간호에 프로 문학의 역사적 필연성을 논한 평론 「신흥 문예의 운동」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평론 「대(大) 톨스토이의 인물과 작품」, 「문학에 반영된 전쟁」을 위시하여, 논문·칼럼·대담 등 다양한 형태의 글들을 발표하였다.

[묘소]

홍명희는 현재 평양시 형제산 구역 신미동에 위치한 애국 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96년 11월부터 홍명희의 고향 충청북도 괴산과 청주에서 매년 10월경 홍명희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1998년에 괴산 제월리에 ‘벽초 홍명희 문학비’가 세워졌으며, 유서 깊은 고가인 괴산읍 동부리 생가가 2002년 충청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중수·복원되었다. 도봉구에서는 홍명희가 살았던 도봉구 창동 244-1번지에 표지판을 세우고, 홍명희의 집터를 비롯하여 송진우, 김병로, 정인보 등 일제 강점기 창동에 은둔했던 독립운동가와 시인 김수영, 계훈제, 영화배우 문예봉 등 도봉에 거주하였던 현대사 인물들의 집터를 돌아보는 도봉 현대사 인물길을 만들어 업적을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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