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779
한자 洪起文
이칭/별칭 대산(袋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류정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3년 9월 23일연표보기 - 홍기문 생
몰년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홍기문 졸
거주|이주지 홍기문 거주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성격 독립운동가|국어학자
성별
본관 풍산
대표 경력 사회 과학원장

[정의]

일제 강점기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은거한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

[가계]

홍기문(洪起文)[1903~1992]의 호는 대산(袋山)이다. 가문은 풍산 홍씨 추만공파(秋巒公派)로서 노론계 명문 사대부가이다. 고조할아버지 홍우길(洪祐吉)은 평안 감사, 한성부 판윤,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증조할아버지 홍승목(洪承穆)은 병조참판을 거쳐 대한 제국 시기 중추원 찬의(贊議)를 지냈고, 할아버지 홍범식(洪範植)은 금산 군수로서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해 비분강개하며 자결한 순국열사이다. 아버지는 『임꺽정』을 저술한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서 명성 황후의 일족이었다. 외할아버지 민영만(閔泳晩)은 을사늑약 당시 자결한 민영환과 6촌 사이로서 종2품 가선대부로 규장각 직학사(直學士)를 지냈다.

홍기문은 2남 3녀의 장남으로서 형제는 남동생 홍기무(洪起武), 여동생 홍수경, 홍무경, 홍계경이 있다. 부인 이계순(李癸順)은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후손으로 이종선(李鐘善)의 딸이다. 슬하에 장남 홍석진(洪錫震)을 두었다. 홍기문은 신간회 활동 시절 근우회 활동가였던 심은숙과 새 가정을 꾸려 홍석부·홍석태·홍석형·홍석중 4남과 막내딸 홍석운을 두었다.

[활동 사항]

1. 수학과 사회 운동

홍기문은 1903년 9월 2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912년 아버지 홍명희의 중국행 이후 홍명희의 고향인 충청북도 괴산에 내려가 증조할아버지의 지도로 한학을 수학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생하고 부친이 투옥되는 사건을 거치면서 민족의식을 각성하였는데, 이때부터 국어 연구에 몰두하였다. 1922년 중국 유학, 이어서 1925년 일본 유학을 떠났으나 국내 학력이 전무했기 때문에 정규 교육 기관에서 수학하지는 못하였다. 중국 유학 시절부터 사회주의를 접하였고, 일본 유학 시절에는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조직한 사회주의 운동 단체인 일월회와 동경 무산 청년 동맹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아버지 홍명희와 함께 신간회 창립 준비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아버지의 지시로 신간회 강령과 규약 작성 등 구체적인 조직 준비 작업을 하였다. 이후 홍기문은 신간회 경성 지회 간부로 선임되어 신간회 해소 때까지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또 프롤레타리아 문학 단체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 동맹]에도 가담하여 비평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28년 12월 학생 공산당 사건 관련 혐의, 1929년 12월 신간회 민중 대회 사건 관련 혐의 등으로 여러 차례 검거되어 고문을 당하였고, 그 후유증으로 병에 걸려 많은 고통을 받았다. 이후 신간회가 해체되면서 사회 활동을 정리하고 국어 연구에 다시 매진하게 되었다.

2. 국어 연구와 방학리 이주

1931년에 『조선 문법 연구』를 집필하였는데, 이 책은 당시 출판 사정 등으로 인하여 해방 이후에 출간되었다. 1928년 가을 조선 일보사에 입사하였다가 1930년에 신병으로 퇴사하였는데, 1932년 말부터 조선 일보사에 재입사하여 일제의 탄압으로 『조선 일보』가 폐간되는 1940년 8월까지 재직하였다. 이 기간 동안 국어학, 국문학, 국사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조선학 관련 논문을 저술하여 『조선 일보』와 기타 학술지에 게재하였다.

홍기문은 『조선 일보』가 폐간되기 전해인 1939년 말에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방학리[현 도봉구 방학동]로 이주하였다. 이 무렵 아버지 홍명희창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홍기문의 집은 아버지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홍기문은 『조선 일보』가 폐간되기 전까지 창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출퇴근하였다. 당시는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고 전시 체제기였기 때문에 민족 운동가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매우 가혹한 시기였다. 특히 사회주의 활동과 신간회 활동으로 여러 차례 검거된 적이 있던 홍기문은 이 시기에 일제 감시의 눈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였다. 대신 이 기간 동안 조선의 언어와 역사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데에 진력하였다.

특히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훈민정음에 관한 저서의 집필에 몰두하여, 『정음 발달사』를 집필하였다[역시 간행은 해방 이후에 이루어졌다]. 『정음 발달사』는 최초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자료로 활용함으로써 선행 연구들보다 훨씬 깊이 있고 진전된 학설을 제시했다고 평가된다. 또 이 시기 동안 『고려사(高麗史)』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숙독하였는데, 이것이 배경이 되어 해방 이후 북한에서 『이조실록(李朝實錄)』 번역 작업을 총괄할 수 있었다.

3. 월북 이후

해방 이후 아버지 홍명희, 아우 홍기무와 함께 서울 신문사에 들어가 주필 겸 편집국장을 역임하였고, 합동 통신사 전무 취체역(取締役)[이사]도 맡았다. 좌우 대립이 극심한 해방 정국에서 아버지를 따라 중간파 활동을 하였으며, 민족 독립당에도 가담하였다. 홍명희가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했을 때, 김일성의 제안으로 북한에 남게 되고, 식구들을 북한에 초빙함에 따라 홍기문도 월북하였다.

1948년 홍기문은 북한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1949년 김일성 종합 대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이후 과학원 어학 연구소 소장, 사회 과학원 부원장, 최고 인민 회의 부의장 겸 상설 회의 부의장, 조국 통일 민주주의 전선 중앙 위원장, 사회 과학원 원장 등 북한 학계와 공직의 주요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1992년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논문으로 「이조실록의 사료적 비판」[1949], 「조선어의 기본 어휘와 어휘 구성에서 고유 어휘와 한자 어휘가 가지는 관계」[1956], 「조선어와 몽고어와의 관계」[1959], 「조선어 한자 어휘의 문제」[1961], 「중국 고문헌의 기록과 조선어의 계통 문제」[1964]가 있다. 저서로는 『조선 문법 연구』[1947], 『정음 발달사』[1946], 『훈민정음 역해(訓民正音譯解)』[1949], 『향가 해석』[1956], 『이두 연구』[1957], 『조선어 역사 문법』[1966]이 있다.

[묘소]

북한 평양의 애국 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북한에서 1973년 9월 김일성 훈장을 받았고, 1981년 12월 국기 훈장 제1급을 받았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이** 홍기문의 장인 이종선(李鐘善) 을 (李種善) 으로 수정해 주세요 세보 확인 요망.
  • 답변
  • 디지털도봉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종선 한자에 대한 근거자료를 보내주시면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pan@aks.ac.kr
2017.01.23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