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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문동 효자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647
한자 雙門洞孝子-
이칭/별칭 「남궁지 이야기」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태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지명 쌍문동 -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관련지명 암회리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성격 설화|효행담|지명 유래담
주요 등장 인물 남궁지|하동 정씨|남궁조
모티프 유형 단지|상분|수명 치환|지명 유래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에서 효자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쌍문동 효자 이야기」는 250년 전에 남궁지(南宮遲)와 그의 부인 하동 정씨(河東鄭氏), 그리고 그들의 아들 남궁조(南宮鋽)의 효행으로 인하여 이 마을에 두 개의 정려문을 세우게 되고, 자연스럽게 이것이 쌍문동(雙門洞)이라는 동명(洞名)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효행담이자 지명 유래담이다. 이를 「남궁지 이야기」라고도 한다.

[채록/수집 상황]

도봉구 문화 관광 홈페이지(homepage)의 전설/민담/설화 항목에 「쌍문동 효자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으며, 함열 남궁씨 종친회 홈페이지에도 수록되어 있다.

[내용]

남궁지는 어려서부터 부모 섬기기를 남과 달리 정성을 다하였고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리고, 부친의 대변을 혀에 대고 병세를 살폈다. 남궁지 처(妻) 하동 정씨는 효도와 우애를 갖추고 있어 해산한 아이를 남에게 맡기고 2년간 시아버지를 지극 정성으로 시중하였다. 그들의 아들 남궁조암회리[현 방학동]에 살면서 모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옷차림을 한 번도 풀지 않고 정성껏 약을 달여 드렸고, 밤에는 북두칠성을 향하여 자신이 대신 죽게 해 달라고 축원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남궁지가 그랬던 것처럼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렸다.

남궁지와 그의 처 하동 정씨, 그의 아들 남궁조의 행실이 조정에 알려져 1893년(고종 30) 조정에서 정문을 내리고, 남궁지남궁조에게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贈職)했으며, 남궁지 처 하동 정씨를 영인(令人)으로 추증(追贈)했다. 현재 쌍문동의 동명은 이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남궁지 등의 묘소는 처음 쌍문리에 있다가 1967년 문중 묘역인 경기도 양주시로 이전하였다. 현재의 정문은 1995년 11월 12일에 복원한 것으로,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에 있는 함열 남궁씨 승지공파 도봉 문중회 선산의 도락재(道樂齋) 재실(齋室) 앞에 있다.

[모티프 분석]

「쌍문동 효자 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단지(斷指)’, ‘상분(嘗糞)’, ‘수명 치환(壽命置換)’, ‘지명 유래’ 등이다. 「쌍문동 효자 이야기」남궁지, 그의 처 하동 정씨, 그들의 아들 남궁조 등이 단지[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임], 상분[변을 맛보고 치료 대책을 세움], 수명 치환[부친과 수명 바꿔치기] 등의 효를 행하여 정려문이 내려졌다는 민담으로서 조선 시대에 가장 중요시 했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나타난 규범적 효행을 강조하고 있다.

[참고문헌]
  • 『도봉 구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1999)
  • 도봉구 문화 관광(http://tour.dobong.go.kr)
  • 함열 남궁씨 종친회(http://www.namgoo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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