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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선생 행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703
한자 靜庵趙先生行狀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구본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01년 - 「정암 조선생 행장」 저자 이황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570년 - 「정암 조선생 행장」 저자 이황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843년 - 「정암 조선생 행장」이 수록된 『퇴계집』 간행
성격 행장
작가 이황

[정의]

조선 중기 이황조광조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행장.

[개설]

「정암 조선생 행장(靜庵趙先生行狀)」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도봉 서원에서 향사되는 인물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평생 살아온 일을 구체적으로 적은 글이다. 「정암 조선생 행장」에 의하면, 홍인우(洪仁祐)[1515~1554]가 먼저 행장을 지어 퇴계에게 보여 주며 퇴계에게도 행장을 지어 달라고 청했다 한다. 홍인우의 행장이 행적 위주의 간략한 글이었다면 퇴계의 행장은 조광조의 성품과 학덕, 신하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 주는 일화(逸話)를 구체적으로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정암 조선생 행장」이황의 시문집인 『퇴계집(退溪集)』 권 48에 수록되어 있다. 조광조의 문집인 『정암집(靜庵集)』 부록에도 실려 있는데, 제목이 「행장(行狀)」이라고만 되어 있다. 한편 홍인우가 지은 조광조의 행장도 있는데, 『정암집』에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황의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이며, 본관(本貫)은 진성(眞城)이다. 이이(李珥)[1536~1584]와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주자의 이기 이원론적 사상 및 영남학파의 창시자인 이언적의 주리설을 계승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구성]

전반부에서는 조광조의 관적(貫籍)을 비롯하여 과거 급제 사실, 환적(宦蹟)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 중반부에서는 조광조의 학덕과 성품, 신하로서의 자세 등을 엿볼 수 있는 구체적인 일화 몇 가지를 들고 있다. 후반부에서는 「정암 조선생 행장」이 이루어지게 된 경위, 홍인우의 행장에 대한 언급, 조광조의 처자(妻子)에 대한 언급 등으로 진행되고 있다.

[내용]

서두에서는 조광조의 자호(字號)와 본관, 선조 가운데 특기할 만한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조광조의 자는 효직(孝直)이고, 자호(自號)는 정암이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7대조 조양기(趙良琪), 고조(古祖) 조온(趙溫), 조부 조충손(趙衷孫), 부친 조원강(趙元綱), 그리고 모친 여흥 민씨(驪興閔氏)의 순으로 조광조의 선조에 대해 언급하였다.

조광조는 좋은 자질을 타고나, 어렸을 때에도 장난치며 놀지 않아 이미 장성한 사람의 풍도가 있었고, 조금이라도 남의 잘못을 보면 즉시 지적해서 말하였다고 한다. 성장하여 글을 읽고 학문을 닦으면서부터 의연하게 큰 뜻이 있으나 오직 과거 보는 글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현의 위풍(威風)을 사모하여 넓게 배우고 힘써 행하여서 성취가 있기를 기약하였다고 했다. 19세에 부친을 여의고 지성으로 모친을 봉양하여 그 효성에 대한 칭찬이 나라 안에 자자하였다고 했다. 이러한 유소년기의 행적에 대한 기술에 이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한 이력을 서술하고 있다.

조광조는 1510년에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차지하고, 1515년에 알성 별시(謁聖別試) 을과에 수석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예조 좌랑(禮曹佐郞)·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지냈다.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상(喪)이 있자 박상(朴祥)[1474~1530]·김정(金淨)[1486~1521] 등이 신씨(愼氏)의 왕후위(王后位)를 회복시킬 것을 청하다가 조정의 의론이 이들을 국문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조광조만이 ‘언로를 막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두 사람이 죄를 입지 않도록 한 일을 특서(特書)하고 있다.

이후 몇 가지 사례를 더 들어 임금의 곁에서 충심으로 임금을 경계하고, 임금 또한 조광조를 극진히 대우하였음을 자세히 거론하고 있다. 스스로 무거운 책임을 지워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고 백성을 어질고 편하게 사는 지경에 오르게 하리라고 생각하였으니, 그 충성은 금석을 뚫고, 그 용맹은 분육(賁育)보다 뛰어났다 하였다. 또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왕의 일만을 생각하는 신하로서 착한 임금의 성대한 시대를 만나 조정에 나아가서는 날마다 세 번씩 알현하고, 물러나서는 사람들이 다투어 손을 올려 존경을 표하였으니, 이는 상하가 서로 기뻐하여 천년에 한번 있을 수 있는 좋은 때라고 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뜻이 크게 행해지지 못하였는데, 이황은 그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는 등용되어 발탁된 것이 너무도 갑작스러웠다는 것이고, 둘째는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이며, 셋째는 귀양 가서 일생을 마친 것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훈은 그침이 없으니 세상의 선비 된 자가 여전히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술(霸術)을 천하게 여길 줄 알며, 바른 학문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며, 정치하는 도리를 반드시 몸을 닦는 데에 근본을 두어서, 모시고 심부름하는 것으로부터 이치와 성(性)을 연구하는 데 이르게 되어서 점차로 분발해 일어나서 하고자 하는 것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조광조의 공이라는 것이다.

결말부에는 조광조의 처자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고, 홍인우가 지은 행장을 퇴계 자신이 보완하게 된 경위에 대해 서술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 있다.

[특징]

행장은 망인(亡人)의 생전 행적을 가급적 소상하게 적는 것을 표방한다. 그런데 「정암 조선생 행장」조광조의 행적을 자세히 적으면서도 행장에서는 보기 드물게 일화를 적극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즉 조광조의 성품과 학덕을 드러내기 위해 일화를 구체적으로 서술하여 임금께 충직했던 성품과 벼슬에 집착하지 않고 언제든 물러나려는 자세 등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정암 조선생 행장」조광조의 학덕과 성품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글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퇴계 이황은 우리나라 성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바, 「정암 조선생 행장」을 통해 그가 학자나 신하가 어떤 점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조광조의 행장이 이루어지게 된 경위 또한 소상히 확인할 수 있다. 조광조는 조선 시대 선비들의 이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도봉 서원에서 향사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정암 조선생 행장」은 조선 시대 도봉 서원을 출입하던 선비들의 지향점을 보여 주는 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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