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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선생 연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705
한자 靜庵趙先生年譜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본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631년 - 「정암 조선생 연보」 저자 박세채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656년연표보기 - 「정암 조선생 연보」 작성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95년 - 「정암 조선생 연보」 저자 박세채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732년 - 「정암 조선생 연보」 『남계집』 간행
배경 지역 도봉 서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지도보기
성격 연보
작가 박세채

[정의]

1656년 무렵 박세채조광조의 사적을 모아 편찬한 연보.

[개설]

「정암 조선생 연보(靜庵趙先生年譜)」는 1656년(효종 7) 무렵에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1631~1695]가 도봉 서원에서 향사되는 인물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생애 및 그에 얽힌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간략히 기록한 연보이다. 「정암 조선생 연보」는 1656년의 사실까지만 적고 있어 박세채가 1656년 무렵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암 조선생 연보」박세채의 시문집인 『남계집(南溪集)』 권84에 수록되어 있으며, 조광조의 시문집인 『정암집(靜庵集)』 부록에도 「정암 선생 연보(靜庵先生年譜)」라고 하여 실려 있다. 양자는 글자 출입이 있기는 하지만 내용은 대체로 같다.

박세채의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 또는 남계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부친은 홍문관 교리 박의(朴漪)이며, 모친은 신흠(申欽)[1566~1628]의 딸이다. 1649년(인조 27)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었는데, 1650년(효종 1)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李珥)[1536~1584]와 성혼(成渾)[1535~1598]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했을 때 영남의 유생 유직(柳稷)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여러 유생들과 함께 유직의 상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효종이 비답(批答)에서 박세채를 꾸짖자, 이것을 계기로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은거하여 경학에만 전념할 뜻을 세웠다. 박세채김상헌(金尙憲)[1570~1652]과 김집(金集)[1574~165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송시열과도 교유했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구성]

1482년 조광조의 출생에 관련한 기록으로부터 1656년 양근(楊根)에 미원 서원(迷源書院)을 건립하여 조광조김식(金湜)[1579~1662]을 배향하였다는 기사까지, 조광조에 얽힌 일련의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광조 사후에 대한 기록으로는 1541년 좌찬성(左贊成) 김안국(金安國)[1478~1543]이 입대(入對)하여 조광조의 직첩(職牒)을 환급해 주기를 청한 일, 1545년에 조광조의 벼슬을 환급한 일, 1557년에 묘를 천장한 일, 1567년 성균관 태학생(太學生) 홍인헌(洪仁憲) 등이 상소하여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한 일, 이후 조광조를 배향한 서원들의 건립 사실을 적고 있는 바, 능주(綾州)의 죽수 서원(竹樹書院), 양주(楊州)의 도봉 서원, 희천(煕川)의 양현사(兩賢祠), 용인의 심곡 서원(深谷書院), 양근의 미원 서원 등이 그것이다. 그 밖에도 1610년 문묘(文廟)에 배향하였다는 사실도 적고 있다.

[내용]

조광조의 생애와 관련한 기록에서는 조광조의 나이 34세 때인 1515년(중종 10)부터 38세 되던 해인 1519년(중종 14) 사이의 기록이 특히 자세하다. 1515년의 기록은 봄에 지평(砥平)의 용문사(龍門寺)에서 독서한 일, 사간원 정언이 되어 박상(朴祥)[1474~1530] 등을 처벌하자는 언론에 반대하며 언로(言路)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계청(啓請)을 올린 일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1517년의 기록에서는 부제학 김정(金淨)[1486~1521]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1454~1504]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청(奏請)한 일 등을 적고 있다. 1518년과 1519년의 기록에서는 임금께 계문(啓聞)한 여러 가지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경연(經筵)에서 앉아서 강의하는 문제, 불시(不時)에 신하들을 소대(召對)할 것을 청한 일, 『대학(大學)』 ‘성의장(誠意章)’을 진강(進講)하면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논한 일, 사기(士氣)를 배양할 것을 추정한 일, 현량과(賢良科)를 배설하도록 청한 일 등이 그것이다. 조광조 사후에 관한 기록으로는 조광조의 직첩 환급, 문묘 배향, 서원 건립 등에 대한 것이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다.

[특징]

「정암 조선생 연보」는 대부분의 연보와 마찬가지로 연기(年紀)를 먼저 적고 그 옆에 조광조의 나이를 병기하였으며, 이어서 해당 연도에 있었던 주요한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해당 연도에 따라 먼저 주요 표제를 제시하고, 그 표제에 관한 일들을 구체적으로 적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정암 조선생 연보」조광조의 일생에 대한 가장 자세하면서도 비교적 객관적인 자료로서 조광조의 평생을 고찰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광조는 조선 시대 선비들의 이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도봉 서원에서 향사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정암 조선생 연보」는 조선 시대 도봉 서원을 출입하던 선비들의 지향점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글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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