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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 대조 조선 전도부군 면리동 명칭 일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748
한자 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문헌/단행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류정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간행 시기/일시 1917년연표보기 - 『신구 대조 조선 전도부군 면리동 명칭 일람』 간행
성격 고도서
저자 오치 다다시치[越智唯七]

[정의]

일제 강점기 오치 다다시치가 저술한 1914년 도봉 지역을 포함한 군면동리(郡面洞里)의 통폐합 이전과 이후의 지명을 대조한 책.

[저자]

오치 다다시치[越智唯七]는 일본 간사이 대학[關西大學] 출신이라는 점만 밝혀졌을 뿐, 신분 및 행적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서문에서 여러 관청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고, 조선 총독부 직원록이나 관보 등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총독부 직원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편찬/간행 경위]

1914년에 군면리동을 통폐합한 이후 3년이 지났지만, 아직 옛 군면동리명과 새로운 군면동리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책이 발간되지 않아 행정상의 큰 불편이 있었다. 이에 오치 다다시치가 『조선 총독부 관보』와 『조선 휘보』, 『구한국 지방 행정 구역 명칭 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 관계 당국자의 회답서, 각종 지도 및 기타 자료를 참조하여 신구 면리동 명칭을 정리하게 되었다.

[구성/내용]

1914년 군면동리 통폐합 정책은 1917년 면제(面制)를 시행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서 면적과 인구 면에서 큰 차이가 났던 면들을 평균화하기 위해 단행되었다. 면적 4방리(方里), 호수 800호를 기준으로 통폐합 작업이 실시되었는데, 이로 인해 면 수가 4,337개에서 1914년 2,522개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면의 구획 획정이 지방 사정에 대한 고려 없이 조선 총독부 일본인 관료들에 의해 탁상에서 일방적이고 폭력적으로 이루어졌다.

1914년 군면동리 통폐합 정책으로 인하여 해등촌면(海等村面)노원면(蘆原面)이 통합되어 노해면(蘆海面)이 되었다. 이때의 통폐합 정책 이후 비로소 창동, 도봉동, 방학동 등 현재의 도봉구 지역의 명칭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즉 1912년에 편찬된 『구한국 지방 행정 구역 명칭 일람』에는 양주군 해등촌면상루원리(上樓院里)·영국리(寧國里)·무수동(無愁洞)·도당리(陶唐里)·우이리(牛耳里)·마산리(馬山里)·유만리(流滿里)·암회리(巖回里)·원당리(元堂里)·계성리(鷄聲里)[원본에는 간성리(鳱聲里)로 되어 있으나 이는 계성리를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창동리(倉洞里)·소라리(所蘿里)가 소속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신구 대조 조선 전도부군 면리동 명칭 일람』에 따르면 1914년 개편 이후 통합된 노해면에는 도봉리(道峰里)·방학리(放鶴里)·쌍문리(雙門里)·창동리(倉洞里)·월계리(月溪里)·공덕리(孔德里)·상계리(上溪里)·중계리(中溪里)·하계리(下溪里)가 소속되었다.

이 중 현재의 도봉구 지역은 도봉리·방학리·쌍문리·창동리에 해당하는데, 『신구 대조 조선 전도부군 면리동 명칭 일람』에 따르면 도봉리는 개편 이전 해등촌면상루원리, 영국리, 무수동, 도당리 일부가 통합되어 탄생하였고, 방학리는 역시 해등촌면암회리 일부, 도당리 일부, 원당리 일부가 통합되어 탄생하였다. 쌍문리는 해등촌면소라리, 우이리, 계성리, 원당리 일부가 통합되어 탄생하였다. 창동리는 기존의 창동리 일부 지역에 유만리 일부, 마산리 일부, 도당리 일부, 노원면의 녹천리(鹿川里) 일부가 통합되어 탄생하였다. 해등촌면 창동리의 일부는 현재의 노원구 월계동에 해당하는 월계리(月溪里)에 포함되었다.

[의의와 평가]

『신구 대조 조선 전도부군 면리동 명칭 일람』은 도봉구 지역의 1914년 이전과 이후의 지명을 알 수 있는 책으로 도봉구의 역사와 지리, 행정사, 식민지 정책사 등의 연구에 기여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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