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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334
한자 現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나영

[정의]

1945년 8·15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서울특별시 도봉 지역의 역사.

[개설]

1963년 1월 서울특별시의 행정 구역 확장으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도봉, 쌍문, 월계, 공릉, 상계]이 서울특별시 성북구로 편입되면서 현 도봉구의 시초가 되었다. 1970년대 서울특별시의 급속한 도시화와 인구 과밀화로 택지 및 도로 수요가 증대하고 환경이 악화되는 등 많은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와 함께 도봉 지역은 도심 인구와 농촌에서 유입된 인구를 동시에 수용하게 되면서 독자적인 행정 체제로 편제될 필요가 있었다. 이에 1973년 서울특별시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신설되어 지역 주민에 대한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다.

[행정 구역]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경성부의 관할 지역이 ‘부·군의 명칭·위치 및 관할 구역의 개정’으로 축소되면서 숭신면이 안창면과 통합되어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이 되었다. 당시 경기도 양주군은 16개면과 148개의 리로 폐치 분합(廢置分合)되면서 노원면해등촌면이 통합되어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와 노원구 지역에 해당하는 노해면(蘆海面)이 되었다. 당시 노해면창동리, 도봉리, 방학리, 쌍문리, 월계리, 공덕리, 하계리, 중계리, 상계리로 구성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8월 13일에는 서울시의 행정 구역이 확장되어 지금의 강북구 일대인 번동, 우이동, 수유동, 미아동 지역이 서울로 편입되면서 성북구 소속의 숭인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63년에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노원구와 도봉구 지역이 편입되어 성북구가 되면서 노해 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8호[1973. 3. 13 공포]에 의해 성북구로부터 도봉구가 분리·신설되면서 모두 22개의 동으로 구성되었다.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357호[1987. 12. 31 공포]에 의해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동쪽 지역을 노원구로 분리·신설했으며 도봉구의 창동, 도봉동, 상계동, 중계동, 하계동 일부가 신설된 노원구에 편입되었다. 1995년에는 법률 제4802호[1994. 12. 22 공포]에 의해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 강북구가 분리·신설되었고, 미아동·번동 일원과 수유동·우이동·쌍문동 일부가 강북구에 편입되었으며, 그 결과 도봉구의 동 수가 대폭 감소되어 15개가 되었다.

[변천]

1. 해방~1949년

식민지 조선의 해방은 조선 인민의 힘만으로 달성된 것은 아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쟁 승리 후 한반도 신탁 통치를 결정했던 미국과 소련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따라 남과 북을 분할 점령하였다. 예상치 못한 분단 상황에서 경기도 양주에서도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통일 독립 국가 수립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 주민들이 자치 기구인 인민 위원회를 조직해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45년 말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이 국내로 전달되고, 좌익들이 삼상 회의 결정을 지지하자 1946년 초부터 양주에서도 좌우익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 1950년대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6·25 전쟁은 도봉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도봉은 서울의 북단에 위치한 지리적인 조건으로 인해 개전 초기부터 북한군과 맞닥뜨린 지역이었다. 북한군은 6월 26일 경기도 의정부-문산 선을 돌파하자 27일 새벽부터는 본격적으로 서울 함락에 나서 퇴계원-창동-봉일천 등 3개 방향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당시 경기도 의정부 지구 전투 사령관인 제7사단장 유재흥(劉載興) 준장은 의정부로 투입된 전력을 동원해 창동을 중심으로 도봉산[우이동]-수락산[상계동]선의 구릉 지대에 방어선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방어 진지가 미처 편성되기도 전에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포병 학교 2교도 대대의 지원을 받으며 전력을 다했지만 방어선을 돌파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1연대장 함준호(咸俊鎬) 대령이 수유리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당시 서울 함락을 저지하기 위해 미아리에서 투입된 제5사단장 이응준(李應俊)과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정릉-미아리-청량리 고지를 잇는 미아리 방어선을 형성하고 방어에 주력했지만, 27일 밤, 수유리에서 미아리로 급습한 북한군의 전차 공격을 막지 못하고 분산 철수하게 되었다. 이후 도봉 지역은 UN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전까지 북한군의 통치하에 있었고, UN군의 북진과 중공군의 남하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6·25 전쟁 의 참화 속에서도 도봉 지역의 교육에 대한 열망은 꺾이지 않았다. 1952년 여성 독립 운동가 차미리사 여사가 설립한 덕성 여자 실업 학교가 덕성 여자 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이후 덕성 여자 대학교는 유수의 여자 대학교로 발전해 인재 양성에 힘써오면서 도봉 지역 주민들의 학습과 문화의 장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3. 1960년대

1963년 1월에 서울특별시의 행정 구역 확장으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도봉·쌍문·월계·공릉·상계]이 성북구로 편입되면서, 현 도봉구가 형성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1961~1969년에는 서울특별시의 수유 지구[현 강북구], 1966~1976년에는 창동 지구, 1966~1980년에는 도봉 지구의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이 시행되었다.

1962년에 도시 계획법이 제정되었지만, 도봉 지역은 여전히 서울의 외곽 지대에 불과한 상태였다. 1960년대 서울 도봉 지역은 도심 인구와 농촌에서 유입된 인구를 동시에 수용하였다. 이와 함께 1962~70년 서울특별시는 도봉구 도봉동, 창동, 쌍문동, 정릉동, 상계동, 중계동, 번동, 공릉동, 영등포구 일대에 판잣집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일대는 도심지에서 밀려난 영세민들이 연쇄적으로 몰려와 이미 형성된 무허가 불량 주거지에 정착하거나 새로운 무허가 불량 주거지를 조성하였다.

1960년대까지 서울 도봉 지역의 주된 산업은 농업이었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심에서 밀려난 영세민들의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잡화, 의류, 가발 및 하청에 의한 기계·전자 부품을 생산하는 가내 공업이나 소규모 공장도 들어서게 되었고, 1966년에는 서울특별시 도봉구가 준 공업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제조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4. 1970년대

1973년 서울특별시 성북구에서 모두 22개 동으로 구성된 도봉구가 분리·신설되었는데, 현재의 강북구, 노원구, 도봉구를 모두 포함한 지역이었다.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6호[1975. 9. 23 공포]에 따라 서울특별시 도봉구 미아동 일부를 성북구로 편입시키고 성북구의 정릉동과 하월곡동의 일부를 도봉구로 편입시키는 행정 구역 개편이 있었으며, 시 조례 제979호[1975. 9. 29]에 따라 정릉동과 하월곡동 일부를 미아동으로 편입하였다. 그 결과 1975년 기준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동은 모두 24개로 늘어났고, 1977년에는 총 29개로 늘어났다. 한편 1973년 도봉구가 신설됨에 따라 도봉구의 구 직제가 새로이 편성되었으며,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로 유보된 지방 자치제가 부활한 1995년까지 구청장[제1대~제18대]은 모두 임명직이 맡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서울 지역에 소재한 유일한 서원인 도봉 서원(道峯書院)이 재건되었다. 도봉 서원은 1573년(선조 6)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으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 1903년 도봉 서원은 지방 유림들에 의해 다시 단이 설치되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훼손되었다가 1970년 초 도봉 서원 재건 위원회의 노력으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 1980년대

1983년에는 북한산이 국립 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85년에는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되어 서울시 중심부로의 접근성이 향상되었다. 1986년에는 경원선의 성북과 의정부 구간이 복선화되면서 도봉 지역뿐만 아니라 의정부 지역 주민들까지도 서울과 일일생활권이 되었다.

1985년에는 수도권 정비 계획의 일환으로 상계 지구[현 노원구], 1986년에는 7월에는 창동·번동에 택지 개발 사업이 시행되어 이들 지역은 준 공업 지역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되고, 주거 지역으로서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와 같이 당시 서울특별시 도봉구 일대가 아파트 단지로 개발됨에 따라 취학 아동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초등학교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1988년에는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 노원구가 분리·신설됨에 따라 도봉구의 인구와 면적이 감소하고 행정동도 20개 동으로 줄었으나, 1989년 노원구의 창동도봉동 일부 지역이 재편입되어 행정동이 27개로 다시 증가되었다.

6. 1990년대 및 2000년대

1991년에는 북한산 주변에 고도 지구를 지정했으며 서울특별시 도봉구 미아동, 번동, 쌍문동, 창동의 일부 지역이 분동함으로써 31개 동으로 확대되었고, 1994년에는 수유동과 방학동이 분동함으로써 33개 동이 되었다. 그러나 1995년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 미아동, 수유동, 번동 등 18개 동이 분할하여 강북구가 신설되어 도봉구는 현재 쌍문동, 방학동, 창동, 도봉동 등 15개 동을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다.

1980년대에 택지 개발 사업이 진행되긴 했지만, 도봉 지역은 1990년대까지 전형적인 서울의 ‘달동네’ 지역이었다. 1994년부터 중랑천 변의 불량 주택 재개발 사업이 시작되어 1996년에 완료되어 이 지역 일대가 새로운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였다.

1991년에는 전국적으로 지방 자치제가 부활함에 따라 지방 의회 의원을 민선으로 선출하였다. 1995년 6월 27일에는 초대 민선 구청장이 선출되었다.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준 공업 지구는 1980년대부터 축소되기 시작해 1990년대에는 도시 기능의 다양화와 시가화 지역의 확대 등으로 인해 더욱 줄어들었고, 현재는 창동 지구, 도봉 지구, 쌍문 지구의 세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1990년대 들어 전 사회적으로 경제 수준이 향상하고 복지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5개의 사회 복지 시설의 건설과 함께 저소득층과 장애인은 대상으로 하는 복지 사업이 시작되었다. 1999년에는 ‘맑고 푸른 도봉 21’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도봉 환경 선언」을 발표하여 21세기 환경과 어우러진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이어 살고 싶은 도시 도봉을 만들기 위해 환경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행동 방침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도봉구민들과 함께 노력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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