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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지구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336
한자 倉洞地區戰鬪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나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7일연표보기 - 6·25 전쟁 창동지구 전투 발발
종결 시기/일시 1950년 6월 27일연표보기 - 6·25 전쟁 창동지구 전투 종결
발생|시작 장소 창동지구 전투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종결 장소 창동지구 전투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한국군 제5사단|한국군 제7사단

[정의]

1950년 6월 27일 한국군과 북한군이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서 벌인 전투.

[역사적 배경]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은 조선인의 힘만으로 달성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해방과 동시에 남한과 북한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 되었다. 해방 직후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통일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자주적인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는 노력이 자생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947년 이래로 미소의 냉전이 격화되고, 양국의 원심력이 강해짐에 따라 남한과 북한은 통일 국가 수립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다.

1948년 남과 북에는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분단 국가가 수립되면서 전쟁의 씨앗이 자라나게 되었다. 1948~50년 남한과 북한은 38선에서 잦은 군사적 충돌을 경험하면서 적대감을 키워가게 되었고,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통한 무력 통일을 추구하였다.

[경과]

개전 초기 북한군의 주공 제1군단과 조공 제2군단의 작전은 서울 점령에 목표가 맞춰져 있었다. 북한군 제1군단은 연천·운천~의정부~서울에 이르는 주공선과 개성~문산~서울에 이르는 조공선에 전투력을 집중하였다. 북한군 제2군단은 춘천~가평~서울 및 춘천~홍천~수원을 주공선으로 전투력을 투입하였다. 즉, 양익으로 포위하여 서울을 점령하고자 하는 작전 계획이었다.

의정부~문산 선을 방어하기 위해 한국군 제1사단과 제7사단, 그리고 춘천~홍천 선을 방어하기 위해 한국군 제6사단과 제8사단은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당시 상당수의 군인들은 타 지역에서 군사 훈련을 받거나 휴가 중이어서 주공선에 투입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탄약과 식량 보급 등의 문제로 인하여 북한군 저지에 실패하였다.

북한군은 6월 26일 의정부~문산 선을 돌파하자 27일 새벽 4시부터 남침을 재개하여 퇴계원~창동~봉일천 등 3개 방향으로 주공을 지향하였다. 당시 의정부지구 전투 사령관에 임명된 제7사단장 유재흥(劉載興) 준장은 의정부로 투입된 전력으로 창동을 중심으로 도봉산[우이동]~수락산[상계동] 선의 구릉 지대에 방어선을 형성하기로 계획하고 철수 부대를 수습하였다. 이에 제7사단 제1연대, 제3연대, 제9연대와 제2사단 제5연대, 제16연대, 제25연대 그리고 제3사단 제22연대의 잔여 병력이 모여 총 6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 창동선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도봉산과 수락산 어간의 넓은 회랑은 적의 기계화 부대 기동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27일 오전 10시경 한국군의 각 부대는 미처 방어 진지를 편성하기 전에 40여 대의 전차와 자주포로 증강된 북한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방어 부대는 포병 학교 제2교도 대대 105㎜ 곡사포 6문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전력을 다하였지만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방어선이 돌파되었다. 이후 한국군 병력은 미아리, 태릉 일대로 분산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1연대장 함준호(咸俊鎬) 대령이 수유리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 시기 창동선 방어에 어려움을 느끼고 미아리에서 수도 서울을 지키기 투입된 제5사단 이응준(李應俊)과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정릉~미아리~청량리 고지를 잇는 미아리 방어선을 형성하고 방어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27일 밤, 수유리에서 미아리로 급습한 북한군의 전차 공격을 막지 못하고 분산 철수하게 되었다.

[결과]

한국군은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창동~미아리 등지에 저지선을 펴고 남침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북한군의 전차 앞에 속수무책이 되어 개전 4일 만인 6월 28일에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함락 당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북한군의 6·25 전쟁 개전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남한군은 개전 초기 무기력하게 서울을 빼앗겼다. 그러나 남한군과 남한 정부가 북한의 전쟁 개시를 사전에 간파하지 못한 것은 이미 1948~50년에 38선 부근에서 잦은 전투를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남한과 미국은 6월 25일 전후 북한군의 군사적 행동의 변화를 감지했지만 이를 일상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정부 수립 이후 2년간의 군사적 충돌이 6·25 전쟁을 일으킨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군은 신속하게 서울을 장악하였지만, 이내 UN군이 참전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고 이후 중공군의 참전으로 6·25 전쟁은 국제전으로 성격을 달리하게 되었다. 6·25 전쟁은 종전된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에게 뿌리 깊은 상처를 남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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