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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377
한자 漢陽劉氏墓域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112~11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은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한양유씨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112~115(N37° 40′ 20.5241″, E127° 02′ 13.4377″)지도보기
성격 묘역
관련 인물 유명장(劉命長)|유세림(劉世琳)|유세남(劉世男)|유석령(劉碩齡)|유집기(劉集基)[1766~1786]|유백수(劉伯壽)|유대인(劉大仁)|유상충(劉尙忠)|유정욱(劉廷彧)|유흥조(劉興祚)|유익해(劉益海)
소유자 한양유씨 종중
관리자 한양유씨 종중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는 조선 후기 통정대부 유명장 등을 중심으로 집장된 한양유씨의 묘역.

[개설]

한양유씨 묘역(漢陽劉氏墓域)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동쪽 묘역에는 이 묘역의 가장 선조인 3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유명장(劉命長), 유명장의 아들 유세림(劉世琳)과 내수사 서제(內需司書題) 유세남(劉世男)의 묘를 중심으로 9세손 유석령(劉碩齡), 12세손 사역원 권지(司譯院權知) 유집기(劉集基)[1766~1786] 등의 묘가 모여 있다. 서쪽 묘역에는 5세손 통정대부 유백수(劉伯壽), 6세손 통덕랑(通德郞) 유대인(劉大仁), 7세손 통덕랑 유상충(劉尙忠), 8세손 충무위 부사과(忠武衛副司果) 유정욱(劉廷彧), 10세손 충무위 부사정(忠武衛副司正) 유흥조(劉興祚), 11세손 증 공조참판(贈工曹叅判) 유익해(劉益海) 등의 묘가 모여 있다.

[위치]

한양유씨 묘역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112~115번지에 있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역에서 도봉역 방향으로 진행하다 보면 신도봉 삼거리가 나오고,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300m 정도 가다 보면 서울 오봉 초등학교가 위치한다. 서울 오봉 초등학교의 서편 뒤쪽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변천]

한양유씨 묘역은 조선 중기부터 조선 말기까지의 한양유씨 인물의 묘역이다. 묘역은 후대에 다시 정비하여 묘표 및 상석, 봉분 등을 옮긴 상태로 원형이 변형되었다. 묘역 한편에는 여러 묘표 및 상석이 도열하여 있고, 묘표 없는 봉분도 있다. 묘역 조성의 시작은 4세손 유세남임진왜란 당시 종묘의 신위를 장악원에 이봉할 때 공을 세워 서리(書吏)에 소속되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17세기 초반 이후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형태]

한양유씨 묘역은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동쪽 구역에는 5열로 모여 있는 무덤군이 있다. 동쪽 구역의 전체 좌향은 남향이다. 가장 상단에는 4세손 유세림의 묘가 있다. 유세림의 묘는 쌍분 합장으로 가운데에 원수 방부형(圓首方趺形)의 묘표를 세웠다. 그리고 두꺼운 석상(石床)과 육각 향탁 형태의 향로석을 상설하였다. 유세림의 묘표, 석상, 향로석은 모두 17세기 이후 양식으로 후대에 추보한 것이다. 그 아래 2열에는 3세손 유명장의 묘가 있으며, 그 아래 세 번째 열에는 9세손 유석령, 12세손 유집기 등의 묘가 있다.

3번째 열에는 3기의 봉분이 있다. 그 양끝에 문석인을 세웠는데, 원래 상설이라고 볼 수 없다. 12세손 사역원 권지 유집기한양유씨 문중에서 처음으로 역관이 된 인물이다. 묘는 단분 합장으로 온양 방씨(溫陽方氏)와 합장하였다. 석물로는 석상, 향로석, 문인형 동자석인을 갖추었다. 석상에는 명문이 음각되었는데, 1788년(정조 12)에 세운 것이다. 석상은 원래 조성한 것이고, 문인형 동자석인은 후대에 추보한 것이다.

또한 그 오른쪽에는 봉분이 없는 석상과 하엽형과 원수형(圓首形) 묘표들이 여러 기 모여 있다. 특히 석상에는 앞면에 ‘□기(□基)’, ‘혁기(赫基)’, ‘준기(俊基)’ 등의 12세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서쪽에는 여러 능선에 흩어져 있는 무덤군이 있다. 가장 북쪽에는 10세손 유흥조의 묘가 있고, 그 서남쪽으로는 7세손 유상충, 6세손 유대인, 8세손 유정욱의 묘가 있다. 유흥조 묘 동남쪽으로는 11세손 유익해의 묘가 있다.

[금석문]

한양유씨 문중은 대부분 간단한 묘표나 석상에 금석문을 남기고 있다. 그중 가장 명확한 것은 12세손 유집기의 석상에 쓰인 것으로 석상 앞면에 ‘사역원 권지 유집기 묘 유인 온양 방씨 부좌(司譯院權知劉集基墓 孺人溫陽方氏祔左)’라고 썼으며, 음기로는 ‘명운 건륭 오십삼 년 무신 월일 병자 방씨 체이립(銘云 乾隆五十三年 戊申月日丙子方氏涕而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렇게 석상에 명문을 써서 묘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양상은 17세기 후반 이후 등장한 것으로 18세기에는 매우 성행하였다.

[현황]

한양유씨 묘역은 16~17세기부터 조선 말까지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석물들은 변색 및 마모가 많이 진행된 상태이다. 특히 하엽형 묘표는 15세기부터 제작된 것이나 마모가 심하여 묘주를 파악할 수 없고, 봉분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거나 여러 비석이 모여 있는 현황이어서 원래의 위치이었는지 모호하다. 한양유씨 종중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한양유씨 문중에는 무관 인물도 많았지만, 역관을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하다. 특히 11세손 유익태와 그의 아들 유성기 또한 역관의 딸과 혼인을 하면서 12세손 유익해·유집기와 13세손 유운복 등 많은 역관이 배출되었다. 『문무 잡과 방목(文武雜科榜目)』에 의하면 역과 합격자 2,061명을 배출한 301개 성관 가운데 한양 유씨는 전체 17위를 차지하여 대표적인 역관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양유씨 묘역은 조선 후기 역관 가문의 묘역 현황을 참고할 수 있는 사례이나 상설 배치 등은 새로 만들고, 후대에 추가한 석물이 많아 많이 변형되었다. 다만 묘표는 하엽형이나 원수형같이 단순한 형태를 많이 조성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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