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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광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589
한자 夜光鬼
이칭/별칭 야귀 할멈,야유광,야광신,앙광이,달귀귀신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집필자 육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시 풍속
의례 시기/일시 음력 1월 1일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에서 설날 밤에 내려와 신을 훔쳐 간다고 믿었던 귀신.

[개설]

야광귀(夜光鬼) 는 음력 1월 1일 밤에 하늘에서 내려와 신발을 훔쳐 가는 귀신을 쫓기 위해 체 등을 걸어 두는 풍속이다. 이를 야귀 할멈, 야유광(夜遊狂), 야광신(夜光神), 앙광이, 달귀귀신 등이라고도 한다.

설날 밤에 야광귀가 하늘에서 내려와 신을 신어 보고 맞는 것이 있으면 신고 갔는데, 이렇게 신을 잃어버린 사람은 한 해의 운수가 좋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설날 밤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야광귀가 신을 찾지 못하도록 방에 들여 놓고 잔다. 섣달 그믐날 밤에는 눈썹이 셀까 봐 잠을 자지 못하고, 설날 당일에는 온종일 세배를 다니느라 피곤하여 대개 설날 밤에는 일찍 잠에 들게 된다.

이를 틈타 야광귀가 오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하여 체를 걸어 둔다. 야광귀가 하늘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밤에 체를 걸어 두거나 혹은 마당에 긴 장대를 높이 세우고 그 위에 체를 걸어 두면, 하늘에서 야광귀가 내려오다가 체를 발견하고 체 눈이 많으므로 이를 세어 보다가, 어디까지 세었는지 잊어버리고는 다시 세고 하는 사이에 날이 밝아 하늘로 되올라간다는 것이다.

이밖에 야광귀를 막기 위하여 머리카락을 태워 마당에 뿌리거나, 일찍 대문을 걸어 잠그고, 때로는 금줄을 쳐서 쫓고, 딱총을 놓아 큰 소리를 내어 쫓기도 한다.

[연원 및 변천]

조선 후기 유득공(柳得恭)[1749~1807]이 편찬한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야광귀의 명칭에 대한 두 가지 설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는 음식을 먹지 못해 바짝 마른 귀신인 구귀(癯鬼)를 뜻한다는 것이다. 야(夜)의 음과 구(癯)의 훈이 비슷한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앞의 것은 잘못된 것이며, 약왕(藥王)이 와전되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약왕은 형상이 추해서 아이들이 무서워하며, 아이들을 일찍 재우기 위해 만들어 낸 것으로 보았다. 야광귀에 대해서는 다양한 기록이 전해 온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이름이 야광인 귀신이 이날 밤 민가에 내려와 아이들의 신발을 두루 신어 보다가 발 모양이 딱 들어맞는 것을 신고 가 버리면 그 신발의 주인은 불길하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것이 무서워 모두 신발을 감추고 불을 끄고 잔다. 그리고 체를 대청 벽이나 섬돌과 뜰 사이에 걸어 둔다. 야광귀가 체의 구멍을 세어 보다가 다 세지 못하여 신발 신는 것을 잊어버리고 닭이 울면 가 버리기 때문이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또 『세시풍요(歲時風謠)』에는 야광귀를 쫓기 위해 머리털을 태우고 재를 뿌리는 풍속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야광귀 쫓기를 정월 대보름에도 행했다고 한다.

[절차]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는 설날 밤에 귀신이 각 집에 왔다가 마당에 놓인 신발을 모두 신어 보고 제 발에 맞는 신이 있으면 신고 가 버린다고 믿었다. 신발을 잃은 사람은 그해에 운수가 나쁘다고 하기 때문에 신발을 방안에 감추어 둔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하여 체를 장대 끝에 걸어 마당에 세워 둔다.

1993년 서울특별시에서 간행한 『서울 민속 대관』의 「놀이의 실상 일람」에서 도봉구 번 2동에 5대째 거주하는 주민 윤수환[남, 66]은 “신을 부엌에 놓고 잠그거나 그 안에 들여 놓는다. 이날 밤에 귀신이 내려와서 신발을 재보고 맞는 것을 신고 간다고 한다. 만약 귀신이 신고 가면 그해의 신수가 좋지 않다.”고 증언하고 있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설날 밤 신을 신어 보고 맞는 것이 있으면 훔쳐 간다는 야광귀를 막기 위하여 신을 방안에 들여놓거나 대청 벽에 체를 걸어 두었다. 혹은 마당에 긴 장대를 세우고 그 위에 체를 걸어 두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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