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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석령에서 도봉을 바라다보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719
한자 祝石嶺-道峯-
이칭/별칭 「축석령 망도봉」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본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70년 - 「축석령에서 도봉을 바라다보다」 저자 김상헌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607년연표보기 - 「축석령에서 도봉을 바라다보다」 창작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52년 - 「축석령에서 도봉을 바라다보다」 저자 김상헌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654년 - 「축석령에서 도봉을 바라다보다」 『청음집』 간행
배경 지역 도봉산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지도보기
배경 지역 축석령 -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리
성격 한시
작가 김상헌

[정의]

1607년 김상헌축석령에서 도봉산을 바라보고 지은 칠언 절구의 한시.

[개설]

「축석령에서 도봉을 바라다보다」는 1607년(선조 40)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포천의 축석령(祝石嶺)에서 도봉산의 경관을 바라보고 느낀 감회를 적은 한시이다. 축석령은 경기도 포천과 양주 사이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축석령에서 도봉을 바라다보다」의 바로 앞에 수록된 시가 「북로기증 하지사 이태징(北路寄贈賀至使李台徵)」인데 태징(台徵) 이수준(李壽俊)[1559~1607]이 하지사(賀至使)로 연행한 것은 1606년(선조 39)이다. 이 시와 전후에 수록된 시의 내용으로 보아 「축석령에서 도봉을 바라다보다」김상헌이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있다가 파직된 직후인 1607년 겨울 무렵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의 원제는 「축석령 망도봉(祝石嶺望道峯)」으로 김상헌의 시문집 『청음집(淸陰集)』 권2에 수록되어 있다.

김상헌의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 또는 석실산인(石室山人) 등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596년 정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고, 1608년에는 문과 중시에 급제하였다. 대사헌·예조 판서 등을 지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났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구성]

기구(起句)와 승구(承句)에서 포천의 축석령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도봉산의 모습을 형용한 후 전구(轉句)와 결구(結句)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도봉산을 오래도록 그리워했으며, 그것을 보는 것이 마치 꿈과 같다고 하고 있다. 전형적인 선경후정(先景後情)의 전개 방식을 취하고 있다.

[내용]

청효귀정동설청(淸曉歸程凍雪晴)[맑은 새벽 돌아오는 길 눈이 얼어 맑은데]

도봉고출옥쟁영(道峰高出玉崢嶸)[도봉산은 높이 솟아 옥처럼 아름답네]

이년관새경심처(二年關塞經心處)[이 년 동안 변방에서 늘 그리던 곳이었는데]

금일환의몽리행(今日還疑夢裡行)[오늘은 되레 꿈속 길인가 의심하네]

[특징]

측기식(仄起式)의 칠언 절구로서, 평성(平聲) 경운(庚韻)으로 압운하였다. 기구의 ‘청(晴)’, 승구의 ‘영(嶸)’, 결구의 ‘행(行)’을 운자로 썼다.

[의의와 평가]

「축석령에서 도봉을 바라다보다」김상헌이 1605년 판관(判官)으로서 함경도 경성(鏡城)에 가 지내는 등 변방에서 오래도록 지내다가 드디어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 그 감회를 적은 것이다. 파주 언저리 축석령에서 멀리 보이는 도봉산의 모습을 옥과 같이 아름답다고 형용한 뒤, 그것을 보는 게 마치 꿈과 같다고 했다. 이는 도봉산의 아름다움을 일컫기 위해 한 말이기도 하지만 속뜻은 서울로의 귀환을 그토록 꿈에 그리워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축석령에서 도봉을 바라다보다」에서는 도봉산을 서울의 징표로 활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방에서 서울로 입성할 때 도봉산이 보이는가의 여부에 따라 자신이 서울에 가까워졌음을 가늠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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