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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인들의 도봉산 기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017
한자 朝鮮時代文人-道峰山紀行
이칭/별칭 도봉첩으로 본 조선시대 문인들의 도봉산 기행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은순

[개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자연을 도(道)가 구현된 공간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혼탁한 속세를 벗어나 자연 안에 머물기를 추구했다. 더욱이 자신이 처한 사회의 현실이 자신이 생각한 도학적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때는 과감하게 벼슬을 그만두고 정치 현실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자연 안에 은거하는 삶을 택하기도 하였다. 자연 안에 은거하면서 자연이 담고 있는 도학적 진리를 되새기며 진리를 탐구하는 삶을 영위하였다. 이렇듯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자연은 단순히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탐승지로서보다는 진리를 담고 있는 진리체로서 인식되었다.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성정(性情)을 수양하였으며, 그것이 곧 도학을 실현하고 체화하는 방편이었다. 도봉산 기행도 동일한 맥락에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도봉산의 승경에 찬탄을 보내다가도 어느새 진리에 대한 관심으로 화제가 바뀌어 있는 경우가 많다.

[도봉산 기행 작가]

도봉산 기행과 관련된 작품을 남긴 작가는 대부분이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이다. 도봉산은 한양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 때문에 많은 시인 묵객 사대부들이 찾았고, 그 감동을 시(詩)나 기(記)의 문학 형식으로 남겼다. 역사와 문학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걸출한 사대부들이라면 거의 어김없이 도봉산을 찾았다. 『동문선(東文選)』 편찬에 참여하고 『동인시화(東人詩話)』 등을 저술한 훈구파의 서거정(徐居正)[1420~1488],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비운의 천재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 오성 부원군으로 유명한 이항복(李恒福)[1556~1618], 한문 사대가의 한 명으로 추앙 받는 이식(李植)[1584~1647], 이이(李珥)[1536~1584]·송시열(宋時烈)[1607~1689] 등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통 계승자로 평가되는 권상하(權尙夏)[1641~1721] 등이 도봉산을 찾았다.

이밖에도 박세당(朴世堂)[1629~1703], 이행(李荇)[1478~1534], 이민구(李敏求)[1589~1670], 이경석(李景奭)[1595~1671], 김득신(金得臣)[1604~1684], 신정(申晸), 이단상(李端相)[1628~1669], 김석주(金錫胄)[1634~1684], 김창협(金昌協)[1651~1708], 김창업(金昌業)[1658~1721], 홍세태(洪世泰)[1653~1725], 최석항(崔錫恒)[1654~1724],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 인오(印悟)[1548~1623] 스님 등 이름만 들어도 훌륭한 행적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명사들이 도봉산을 유람하였고, 또 명승지를 기행한 감회를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 도봉산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았지만 조광조(趙光祖)[1482~1519]와 송시열을 배향한 도봉 서원과 관련된 기록도 많다. 이 글에서는 도봉산을 직접 기행하고 적은 글을 위주로 하여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도봉산에 대한 인식과 감상을 더듬어 보도록 한다.

[도봉산 기행 작품]

1. 이항복「추일유도봉산(秋日遊道峯山)」

경측고사옹(逕側孤槎擁)[길은 외로운 뗏목이 막힌 데서 기울고]

계회소동음(溪廻小洞陰)[시내는 작은 골짝 음지로 돌아 흐르네]

풍감산기부(楓酣山氣富)[단풍 짙으니 산기운이 풍부하고]

등암수성심(藤暗水聲深)[등덩굴 침침하니 물소리가 깊구나]

득의시망어(得意時忘語)[뜻을 얻으면 때로 말하길 잊고]

회인역폐음(懷人亦廢吟)[사람을 생각하면 읊는 것도 폐하네]

청류완어락(淸流玩魚樂)[맑은 물에 고기 구경하기 즐거우니]

지리재무심(至理在無心)[지극한 이치는 무심한 데 있다오]

위의 시는 백사(白沙) 이항복이 지은 한시로, 번역은 한국 고전 번역원의 국역을 옮긴다. 가을 산의 고즈넉한 정경이 잘 묘사되어 있는 가운데, 자연의 정경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촉발된 인간사를 떠올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의 풍경 속에 내재된 지극한 이치에 화자는 주목하고 있다. 가을 산의 골짜기, 단풍, 산의 기운, 물소리 등을 대하면서도 인간 세상의 득의와 회인(懷人)을 떠올리는 화자이다.

이 무렵 화자에게 어떤 현실적 고뇌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뜻을 얻었다고 마음껏 이야기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잊어야 하는[忘語] 상황이었으며, 사람들을 떠올리면 읊조리는 것마저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廢吟] 상황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자연에 대한 감각적 차원에서의 감상이 인간사에 대한 고뇌로 이어졌지만, 다시 화자는 자연 속에 내재된 이법(理法)을 알아차린다.

맑은 물속에서 무심히 유영하는 물고기들을 역시 무심히 바라보는 즐거움, 결국 지극한 이치는 무심(無心)에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화자이다. 이항복도봉산 기행은 단순한 감각적 감상에 그친 것이 아니라 무심이라는 지극한 이법을 깨닫는 기행이 된 것이다. 자연 속에서 성정을 순화하여 지극한 도에 이르고자 한 유자(儒者)의 기행인 것이다.

2. 이식의 기행시

택당(澤堂) 이식은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일컬어지던 한문 사대가 중 하나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 계곡(谿谷) 장유(張維)[1587~1638] 등과 조선 시대 한문 문장의 대가로 손꼽히던 인물이다. 그가 남긴 『택당선생집(澤堂先生集)』의 제4권에는 심액(沈詻)[1571~1654], 유희경(劉希慶)[1545~1636] 및 그의 종제(宗弟)인 이침(李梣)과 도봉산을 유람하고 남긴 두 수의 시가 전한다. 이항복의 작품처럼 기행과 감상의 순간에도 따라다녔던 유학자로서의 고뇌가 표면에 직접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재치 있는 발상의 전환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소개해 본다.

이식, 심액, 유희경이 하루 먼저 도봉산을 유람한 뒤 날이 저물자 도봉 서원에서 묵고 이튿날 이침이 합류하였다. 이식은 벗들과 함께 시냇가를 걸으며 꽃도 감상하고 흐르는 물소리,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귀도 기울이면서 두 수의 시를 창작하였는데, 역시 한국 고전 번역원의 번역본을 아래에 옮겨 본다.

노파진무뢰(老罷眞無賴)[시들시들 늙으면서 무료(無聊)하기 짝이 없다가]

춘내각유정(春來却有情)[봄이 오자 나도 몰래 슬슬 일어나는 흥]

우심촌수약(偶尋村叟約)[촌 노인과 맺은 약속 우연히 떠올리고]

득여사군항(得與使君行)[우리 사군 함께 가자 소매 잡아 끌었다오]

벽색단화영(壁色團花影)[암벽엔 무더기로 얼룩덜룩 꽃 그림자]

송풍합간성(松風合澗聲)[개울물과 합주(合奏)하는 소나무 바람 소리]

서누등최호(書樓登最好)[서루에 올라 보소 얼마나 기막힌지]

산월우생명(山月又生明)[산마루의 저 달이 또 차 오르기 시작하네]

이마미감책(羸馬未堪策)[힘없는 조랑말 채찍질을 감당하랴]

서천고동춘(徐穿古洞春)[옛 골짝 봄 경치를 천천히 뚫고 가네]

심원지유노(尋源知有路)[무릉도원(武陵桃源) 찾아가는 길 내가 잘 알고말고]

출곽이무진(出郭已無塵)[성읍(城邑) 빠져나오면서 속진(俗塵) 말끔해졌는걸]

간석수항곡(澗石隨行曲)[시냇물 굽이굽이 길 따라 기암괴석이요]

임화전석신(林花轉席新)[자리 바꿀 때마다 숲 속의 꽃 새로워라]

환종내역소(宦蹤來亦少)[벼슬아치 어떻게 여기에 자주 올 것인가]

천폭막심진(泉瀑莫深嗔)[폭포수여 성내면서 꾸짖지 말아다오]

긴 겨울이 지나고 생동하는 봄을 맞아 일어나는 춘흥(春興)이 재치 있으면서도 절묘하게 포착되어 있다. 나이가 한 살 두 살 더 들어가면서 일상의 삶이 반복되다 보니 무료함을 느낄 때쯤, 예전의 봄이 또 찾아왔건만 이번에 느끼는 봄은 예전과 달리 더 유정한 데가 있었던가 보다. 이식은 불현듯 봄이 되면 도봉산을 찾겠다던 유희경과의 약속을 떠올리고 심액에게 전갈을 넣어 함께 유희경을 방문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의 제목은 「동금산침사군액 유노인희경 유도봉숙서원 익일 종제주부 침추도 공음계석상구호 이수(同錦山沈使君詻 劉老人希慶 遊道峯宿書院 翌日 宗弟主簿 梣追到 共飮溪石上口號 二首)」이다. 제목에서 유희경을 ‘유노인 희경(劉老人 希慶)’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작품 안의 촌수(村叟)는 유희경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식은 1584년(선조 17)에 태어났고, 유희경은 1545년(인종 1)에 태어났으며, 유희경의 신분이 사대부가 아닌 천인이었기 때문에 유노인이라고 한 듯하다.

유희경은 시를 잘 지었는데, 도봉산 자락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는 침류대(枕流臺)라 하고 이곳에서 사대부, 중인 문인들과 시로써 교유하였다고 한다. 이를 ‘침류대 시사(枕流臺詩社)’라고 칭하는데, 도봉산이 당대 문인들의 주요 활동 공간이 된 셈이다.

상촌 신흠의 글에서 이러한 문학 활동에 대한 증언을 확인할 수 있는데, 신흠의 「유희경의 시축에 제하다[題劉希慶軸]」라는 글에서 “유생(劉生)은 시장에 사는 사람이지만 십 분의 일의 이윤을 추구하는 장사치를 하지 않고 어진 사대부를 따라 놀기를 좋아했으며 시례(詩禮)로 몸단속을 하였다. 도봉산 아래다 집을 짓고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기고 있는데, 지금 나이 칠십 구세지만 몸놀림이 가볍고 건강하며 얼굴도 동안(童顔)이어서 내 그의 사람됨을 좋아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시를 써 달라기에 이렇게 읊어 그에게 주었다.”라 한 대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이화우(梨花雨) 흣릴 제 울며 잡고 이별(離別)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각가 천리(千里)에 외로온 만 오락가락 노매”[진본 『청구영언』]는 매창(梅窓) 이향금(李香今)[1573~1610]이 유희경을 그리워하여 지은 것으로 유명한 시조인데, 스물여덟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녀와 애틋한 사랑을 펼칠 정도로 유희경은 낭만적이고 풍류적인 면모를 갖추었을 것이다.

이식의 시는 꽃, 소나무, 바람, 달 등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 멋진 정경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위고 힘없는 말이 춘경을 빨리 보고자 하는 화자의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지만, 그러한 말의 서행(徐行)이 오히려 골짜기의 세부까지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볼 수 있게 했다는 구절에서는 발상의 전환이 재치가 넘친다.

그뿐만 아니라 폭포에게 건네는 말도 그야말로 일품이다. 폭포수가 시원스레 쏟아내는 소리를 성내는 소리로 전환하여 인식하고는, 화자가 환로에 매어 있는 몸이기에 자연을 찾을 기회가 드물고 그렇기 때문에 속진을 시원스레 씻을 기회가 없는데, 이렇게 모처럼만에 봄의 풍광을 만끽하며 무릉도원 속에서 속세의 때를 말끔하게 씻는 것을 나무라지 말라고 폭포에게 당부하는 모습에서 또 한 번 재치 있는 발상의 전환을 읽어낼 수 있다.

3. 서거정「도봉산 영국사(道峯山靈國寺)」

다음 작품은 서거정이 지은 「도봉산 영국사」라는 작품으로 『사가시집(四佳詩集)』 제 5권에 실려 있다.

산하하년불찰개(山下何年佛刹開)[산 아래다 어느 해에 불찰을 열었던고]

객래종일족배회(客來終日足徘徊)[길손이 와서 온종일 배회할 만하구려]

개창운기배첨입(開窓雲氣排簷入)[창을 여니 구름 기운은 처마를 밀쳐 들오고]

의침계성권지래(欹枕溪聲捲地來)[베개 베니 시내 소리는 땅을 말아서 오누나]

고탑유층공백립(古塔有層空白立)[층층의 옛 탑은 부질없이 하얗게 서 있고]

단비무자반청퇴(斷碑無字半靑堆)[글자 없는 조각난 비는 풀에 반쯤 묻혔네]

잔년진기인간사(殘年盡棄人間事)[내 여생엔 인간의 일을 모조리 버리고]

결사향산의불회(結社香山擬不回)[향산에 결사하여 돌아가지 않으련다]

서거정은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동문선』, 『동국통감(東國通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편찬에 관여하는 등 관각 문학을 이끌었으며, 『동인시화』,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등을 저술하여 국가 성립기의 문풍을 주도하였다.

이처럼 새 국가의 새로운 문화를 창달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임에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수많은 번뇌를 느끼며 세상과 절연하고 싶은 심정을 느낄 때도 있었던가 보다. 도봉산영국사를 찾은 화자는 고탑이 오랜 풍상 속에 허옇게 자신의 속살을 드러낸 모습과, 이미 글자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기나긴 세월을 버텨 온 비석이 풀숲에 묻혀 있는 모습을 보고 삶의 무상함을 깨닫는다.

그 결과 자신의 나머지 생애 동안은 인간 세상의 일들일랑 모두 버려 버리고 중국의 백거이(白居易)가 불교에 심취했던 것처럼 속세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며 결연한 마음을 내보인다. 어떤 일이 있어도 궁극적 관심은 현실 사회에 있어야 할 유학자의 토로이기에 시인의 고뇌의 깊이를 더욱 절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영국사는 현재는 없어졌으며, 그 터에 도봉 서원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서거정이 관각 문학으로서의 작품 활동을 했다면 같은 시기, 김시습은 이와는 대척점에서 방외인으로서의 문학 활동을 전개했다. 김시습 역시 도봉산과 관련한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도봉첨수(道峯尖岫)」라는 제목의 칠언 율시이다. 김시습이 수락산에서 살 무렵 가까이에 있는 도봉산을 찾고 지은 작품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도봉산의 산세를 칼끝[劍鋩]에 비유하며 우뚝한 형상을 묘사하면서도 나뭇잎 떨어지고 기러기 날아가는 쓸쓸한 가을 풍경도 담겨 있다.

권상하「중춘에 이계이 광하와 함께 도봉산에서 놀다[仲春與李啓以 光夏 同遊道峯]」라는 작품도 눈여겨볼 만하다. 기유년에 지었다고 하니 권상하의 나이 29세에 지은 것이다. 권상하우암(尤庵) 송시열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시를 지은 것은 혈기 왕성한 29세 때였고, 동행한 이광하(李光夏)[1643~1701] 또한 두 살 아래였으니 역시 패기가 충만한 나이였다. 산길을 올라 층층이 기이한 바위를 마주하며 감탄하기도 하고, 길이 끊긴 험한 봉우리에 놀라기도 한다. 중춘(仲春)이라고는 해도 아직 꽃이 활짝 만개하지 않은 것이 아쉬웠던지 모춘(暮春)에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면서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4. 김창업「도봉기유(道峯紀遊)」

『노가재집(老稼齋集)』에 수록되어 있는 김창업「도봉기유」도 살펴보아야 할 작품이다. 김창업김수항의 넷째 아들이며 김창협, 김창흡 등과 형제였다. 진사시에는 합격했으나 관직을 마다하고 한양의 동교(東郊) 송계(松溪)와 포천의 영평산(永平山)에서 살았다. 포천의 영평산에서 살게 된 것은 기사사화 때문이었는데,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하는 내용의 상소를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이 올려 숙종의 잘못을 지적하자, 숙종송시열을 사사하고 김창업의 아버지인 김수항김수흥 등을 파직하고 남인을 중용하게 되는데, 이때 김창업이 영평산으로 들어갔다. 정국이 다시 노론으로 기울자 김창업은 다시 송계로 돌아왔다.

김창업은 평생 관직을 마다하고 전원에 은거하였는데 그림 그리기, 시 짓기, 사냥 등을 즐기며 살았다. 이러한 성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시조 한 수를 소개해 본다. “벼슬을 저마다 면 농부(農夫)리 뉘이시며 의원(醫員)이 병(病) 고치면 북망산(北邙山)이 져려랴 아야 잔(盞) 특 부어라 내 대로 리라”[진본 『청구영언』]. 벼슬을 모두 하면 농사는 누가 지으며 의원이 모든 병을 고치면 북망산에는 누가 가겠는가라고 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살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조정에서 내려준 내시교관 벼슬도 마다하며 평생을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살았던 김창업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시조이다.

「도봉기유」는 5언 78행의 장편 한시인데, 봄철에 말을 타고 매 사냥을 나가는 정경으로부터 시작된다.

아거재동고(我居在東臯)[나는 동고(東皐)에 살면서]

조석망도봉(朝夕望道峰)[아침저녁으로 도봉을 바라보았지]

가유우유시(佳遊偶有詩)[아름다운 유람에 우연히 시(詩)도 있으리니]

금일리아공(今日理我筇)[오늘 나는 행장을 꾸렸네]

미우습춘복(微雨濕春服)[가랑비는 봄옷을 적시고]

몽몽자원송(濛濛自遠松)[자욱히 먼 곳의 소나무를 덮네]

양응재마전(良鷹在馬前)[훌륭한 매는 말의 앞에 있고](하략)

인용한 부분은 「도봉기유」의 시작 대목이다. 아침저녁으로 도봉산을 바라볼 만큼 화자는 도봉산에 대한 애정과 친근함이 있다. 이런 애정 때문이었는지 김창업은 「자회룡환도봉 동구 별순서선귀(自回龍還道峰 洞口 別舜瑞先歸)」[『노가재집』]도 남긴다. 가랑비가 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준비하며 매를 데리고 도봉산 기행에 나섰다. 김창업은 매 사냥을 즐겼던 것 같다.

조선시대 사대부에게 매 사냥은 훌륭한 취미였을 텐데, 김창업은 이와 관련한 시조도 남겼다. “자 나믄 보라매를 엇그제  손 혀 짓체 방올라 석양(夕陽)에 밧고나니 장부(丈夫)의 평생득의(平生得意) 이인가 노라”[진본 『청구영언』]. 한 자가 조금 넘는 보라매를 이제 막 길을 들여서 꽁지에 방울을 달아 팔에 얹고 나설 때의 감정이 얼마나 좋았던지 김창업은 ‘장부의 평생 득의는 이 뿐인가 하노라’라고 감탄하고 있다. 호탕한 내면을 그대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시작된 도봉산 기행은 도화(桃花)가 흐드러지게 핀 모습도 감상하고 연꽃처럼 우뚝 서 있는 만장봉도 우러러보는 등 도봉산의 유려한 자연 경관에 대한 감상으로 이어진다. 자연뿐만 아니라 도봉산 사람들과의 만남도 서술되는데, 도봉 서원에 들어가 조카를 비롯한 유생들과의 만남, 나물을 삶아 대접하는 스님과의 만남 등도 그려지고 있다.

우암 송시열과 자신의 백부(伯父)인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1624~1701]의 글씨를 대하고는 선현의 기상과 인품을 숭모하기도 한다. 아마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도봉동문(道峯洞門)’ 등 우암의 글씨와 ‘고산앙지(高山仰止)’라는 김수증의 글씨를 마주하고는 송시열, 김수증을 비롯하여 도봉 서원에 배향된 조광조와 같은 선배 학자들의 강직한 성품, 학문적 업적, 삶의 자세 등을 되새겼을 것이다. 「도봉기유」의 후반부에서도 사령운(謝靈運)[중국 남북조시대의 시인]과 하옹(何顒)[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의 발자취를 찾아 따르겠다며, 삶에 대한 성찰을 끝으로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다.

5. 기타의 작품

지금까지 조선조 사대부들의 도봉산 기행과 관련된 몇몇 작품을 일별하였다. 그러나 이 밖에도 수많은 작품을 열거할 수 있을 만큼 도봉산은 조선조 사대부들에게 인기 있는 탐방지였다. 이행의 『용재집(容齋集)』에 실린 「도봉청운(道峯晴雲)」, 홍언필(洪彦弼)[1476~1549]의 『묵재선생문집(默齋先生文集)』에 실린 「도봉비천(道峯飛泉)」, 이민구의 『동주선생시집(東州先生詩集)』에 실린 「도봉산가(道峯山歌)」, 이경석의 『백헌선생집(白軒先生集)』에 실린 「도봉도중(道峯途中)」, 김득신의 『백곡선조시집(柏谷先祖詩集)』에 실린 「도봉(道峯)」, 김노겸(金魯謙)[1781~1853]의 『성암집(性菴集)』에 실린 「유도봉기(遊道峯記)」, 신명현(申命顯)[1776~1820]의 『평호유고(萍湖遺稿)』에 실린 「유도봉기」, 홍직필(洪直弼)[1776~1852]의 『매산문집(梅山文集)』에 실린 「유도봉기」, 조선 후기 학자인 홍낙수(洪樂受)의 『두계집(杜溪集)』에 실린 「도봉심폭기(道峰尋瀑記)」 등 많은 작품이 전해 온다. 승려인 인오의 『청매집(靑梅集)』과 역시 승려인 명찰(明察)[1640~1708]의 『풍계집(楓溪集)』에도 도봉산을 소재로 지은 작품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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