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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봉기」[김노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693
한자 遊道峯記-金魯謙-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본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81년 - 「유도봉기」 저자 김노겸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796년연표보기 - 「유도봉기」상, 창작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797년연표보기 - 「유도봉기」하, 창작
저자 몰년 시기/일시 1853년 - 「유도봉기」 저자 김노겸 사망
배경 지역 도봉산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지도보기
성격 기문
작가 김노겸

[정의]

1796년과 1797년, 김노겸이 두 차례에 걸쳐 도봉산과 수락산을 유람하고 쓴 기문.

[개설]

「유도봉기(遊道峯記)」는 상편(上篇)과 하편(下篇)으로 되어 있는데, 성암(性菴) 김노겸(金魯謙)[1781~1853]이 나이 16세가 되던 1796년(정조 20)과 그 이듬해인 1797년(정조 21)에 각각 독서(讀書)를 위하여 도봉 서원을 찾았다가 도봉산과 수락산을 유람한 내력을 기록한 글이다.

「유도봉기」김노겸의 시문집 『성암집(性庵集)』 권3에 수록되어 있다. 『성암집』은 두 종이 있는데, 70세 이전의 김노겸의 저작을 수록한 것이 규장각 소장본 『성암집』이고, 70세 이후의 저작을 모은 것이 국립 중앙 도서관본 『성암집』이다. 이 「유도봉기」는 그 가운데 규장각 소장본에 수록되어 있다.

김노겸의 자는 원익(元益), 호는 성암 또는 길고자(吉皐子)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부친은 사헌부 감찰 김사주(金師柱)로, 1814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홍산 현감 등을 지냈다. 심능숙(沈能淑)[1782~1840], 유병주(兪秉柱)[1778~1840], 윤정현(尹定鉉)[1793~1874] 등과 교유하였으며, 고증학적 학문 태도로 경학, 사학, 음악, 언어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폭넓은 관심을 가졌다. 저서로는 『성암집』이 전한다.

[구성]

1796년에 도봉산을 유람하고 지은 「유도봉기」 상편은 10월 13일에 도성을 출발하여 도봉동구(道峯洞口)에 이른 후 도봉 서원과 그 주변을 유람하고, 특히 도봉 서원에서 머물며 독서한 침류당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서원의 규율과 원생(院生)들의 생활상에 대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편 1797년에 도봉산과 수락산을 유람하고 지은 「유도봉기」 하편은 2월에 도봉 서원에 가서 한 달 간 독서한 후 3월 20일에 족질(族姪)과 함께 만장봉(萬丈峰)에 오르기로 하고 옥천암(玉泉庵), 망월암(望月庵), 그리고 수락산의 청풍정(淸風亭), 학림사(鶴林寺), 흥국사(興國寺) 등을 방문한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내용]

1. 「유도봉기」 상편

「유도봉기」 상편은 도봉산의 전반적인 사항, 즉 삼각산에서 이어져 ‘만장(萬丈)’이라 일컬으며 ‘도봉(道峯)’이 그 다른 이름이라 한 것이라든지, 도봉산의 산수가 매우 맑고 빼어난 것이 마치 금강산과 같아 소금강(小金剛)이라 칭해지기도 한다는 등의 말을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한 아름다운 곳에 꼭 한번 노닐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다가 1796년 10월에 작자의 족질 김만희(金晩喜)가 도봉 서원조광조(趙光祖)[1482~1519]와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배향한 곳이며 독서하기에도 좋은 곳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온다. 그 편지에는 도봉 서원의 규율도 언급되어 있는데, 가령 매일 새벽마다 사당에 배알해야 하며, 만약 그것을 게을리 할 때에는 여러 선비들이 모두 모여 벌을 내려 몸을 단속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작자는 10월 13일에 족질과 함께 동문을 나서서 도봉 서원으로 향한다. 날이 저물 즈음 원촌(院村)에 이르러 송시열의 글씨를 보고 말을 내려 서원에 들어가니 서원 가운데의 뜰과 섬돌에 그윽한 난초와 푸른 소나무, 늙은 잣나무가 있어 정암(靜庵)우암(尤庵) 두 분의 기상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먼저 묘정에 들어 분향하고 절을 하고는 여러 생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광풍당(光風堂)을 돌아보고 제월루(霽月樓)에 올라 경관을 감상한 후 영귀문을 나서서 노닐었다. 다음날 아침 서원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원중의 유생(儒生)들과 소광정(昭曠亭)을 찾았다. 때마침 큰비를 만나 계곡물이 불어 힘겹게 소광정에 이르러 그 앞의 폭포를 구경하고 다시 서원으로 돌아왔다. 날이 저물어 술을 한 잔씩 마시고는 원중의 서생들이 침류당을 기피하는 이유를 듣고는 침류당에서 기거하며 독서하기로 하고 3개월 간 그곳에서 독서하며 머물다가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2. 「유도봉기」 하편

「유도봉기」 하편은 6일 동안 도봉산과 수락산을 유람한 기록을 담고 있다. 일정이 길어 날짜가 바뀔 때마다 별항(別行)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미 1796년 10월에 도봉 서원에 독서하러 가면서 도봉산을 유람한 일이 있었지만 그때의 유람은 유람 자체가 목적이 아니어서 마음껏 도봉산 구석구석을 돌아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다가 그 이듬해 2월에 다시 족질과 함께 도봉 서원에 들어가 모시(毛詩)를 읽고 3월 20일 무렵에 하산하려 하다가 족질 김만희에게 “도봉 서원에 와 보고도 만장봉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궐리(闕里)[공자의 출생지]를 지나면서 공자(孔子)를 뵙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래서야 쓰겠는가?”라 하였고, 족질 또한 그 말에 동의하였다 한다. 이에 4, 5일 정도 기한을 미루어 도봉의 여러 명승지를 둘러보기로 한다.

이튿날인 21일, 아침을 먹고 이해석(李海錫)과 함께 원통사(圓通寺)에 이르렀다가 다시 옥천암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고 만장봉에 올랐다. 옥천암에 가서 저녁을 먹고 황혼녘에 서원으로 돌아와 동재(東齋)에서 묵었다. 22일에는 망월암에 갔다가 저녁으로 두포(豆泡)를 먹고 망월루(望月樓)에 올랐는데 승려 낭규(朗奎)가 시를 간절히 요구하기에 시를 세 수 써 주었다. 그 세 수 가운데 두 수는 각각 당나라 이고(李翶)의 시와 송나라 양대년(楊大年)의 시였다. 그런데 낭규가 세 수 모두 김노겸이 지은 것이 아니며 첫째 수는 이고의 것, 둘째 수는 양대년의 것, 셋째 수는 향산(香山)의 것이라 지적하며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묻는다.

이에 김노겸은 첫째 수와 둘째 수는 각각 이고와 양대년의 것이 맞지만, 셋째 수는 향산의 것이 아니라 김노겸 자신이 직접 지은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는 선사(禪師)들이 마음속에 보존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장난삼아 그렇게 한 것이라 대답하였다. 밤에 서원에 돌아와 계개당(繼開堂)에서 자는데 큰비가 내렸다. 23일에는 수락산에 가려 했으나 비가 더욱 거세게 내려 결행하지 못하였다. 하루 종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에 소광정에 다녀와 밤에 서원의 서재(西齋), 즉 의인재(依仁齋)에서 잤다.

24일에는 드디어 비가 그쳐 수락산으로 출발했다. 먼저 청풍정에 갔다가 동봉 서원(東峯書院)에 이르러 사당에 배알하고 석림사(石林寺)에 올랐다. 저녁에 학림사에서 묵었다. 25일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흥국사로 향했다. 오후에 성사(聖寺), 곧 내원암(內院庵)에 갔다가 다시 청풍정에 가서 노닐었다. 26일에는 아침을 먹고 출발하여 오시(午時)가 되어 도성에 이르렀다. 이번 유람에서 만장봉과 수락산 등 여러 명승을 둘러보았는데 유독 이 기문의 제목을 ‘도봉’이라 한 것은 도봉 서원에서 독서한 것을 계기로 이 유람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여 제목을 그렇게 붙인 연유를 언급하고 있다.

[특징]

상편에 비해 하편의 분량이 길어 하편에서는 날짜가 바뀔 때마다 별항으로 작성하고 있다. 한편 하편에서 만장봉에 오르는 길이 너무 험해서 동행한 이의규(李儀奎) 등이 바위를 더위잡고 올라가다가 떨어졌다는 것이나 앞서 가던 승려로 하여금 떡갈나무에 줄을 매게 하고 일행들이 그 줄을 잡고 올라갔다는 것 등 상황 묘사가 더욱 두드러진 것이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김노겸「유도봉기」는 여러 측면에서 주목되는 글이다. 먼저 이동 간의 동행인들의 언행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가령 상편 가운데 서원에서 소광정으로 이동하던 도중 갑작스런 비 때문에 계곡물이 불어났는데 여덟 척이나 되는 냇물을 건너야 했다. 동행한 이들이 다들 머뭇거리고 있는 가운데 작자 김노겸이 그 냇물을 건너뛰자 모두들 따라 건넜다. 그러다가 동행한 이들 가운데 이(李) 아무개라는 자가 물을 건너다 빠져서 물이며 신발이 다 젖었다. 함께 간 김노겸의 족질이 그를 놀리며 “뱁새가 다리가 짧으니 어찌 능히 대붕(大鵬)에 미치겠는가.”라 하자, 물에 빠졌던 이 아무개가 이를 맞받아쳐 족질을 욕보인 일화를 적고 있다.

또한 「유도봉기」는 매일 새벽마다 사당에 배알하는 것을 게을리 하면 엄하게 처벌된다는 등 도봉 서원의 규율에 대해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도봉 서원 가운데 유생들이 선호하던 건물과 그 이유 등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즉 서원의 재사(齋舍) 가운데 광풍당은 고직(庫直)[관아의 창고를 보살피고 지키던 사람]이가 사는 곳과 거리가 아주 가깝고 거처와 음식이 편리한 까닭에 선비들이 다투어 거처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에 반해 침류당은 구석지고 여러 재실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추운 겨울에는 음식도 금방 식고 건물이 높아 찬 기운이 사람을 핍박하여 글 읽는 선비들이 거처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처럼 「유도봉기」도봉 서원에서의 유생들의 생활상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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