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871 |
---|---|
한자 | 白映月 |
영어음역 | Baek Yeongwo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경혜 |
[정의]
조선 말기 창원 출신의 기생이자 자선가.
[개설]
백영월의 양아버지는 하유언이며 양오빠는 하성복이다. 후사가 없어 하씨 집안의 하소두를 양자로 삼아, 현재 하찬석으로 대가 이어지고 있다.
[활동사항]
백영월은 3~4세 때 당시의 창원군 북동마을의 유지였던 하유언의 집 대문 앞에 버려졌다. 이에 하유언이 양녀로 받아들이고는 수소문하여 백영월의 본 수원백씨(水原白氏)를 찾아주었다. 18세까지 하유언의 집에서 살다가 19세 때 가출을 하였다. 이 후 백영월은 큰돈을 모은 뒤 다시 하유언의 집으로 돌아와 북동마을에 자신의 전 재산을 희사하여 마을 발전에 큰 몫을 하는 한편 주민들에게도 큰 혜택을 주었다.
가출 후 백영월의 구체적인 행적은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기생으로 돈을 모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마을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일본군 간부를 상대로 하는 기생 또는 첩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독립군을 자신의 집에 숨기기도 하였는데, 백영월이 상대하는 일본군 간부가 워낙 거물이라 가택수색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미상이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고개 도로변에 있다. 상석에는 ‘정부인수원백씨지묘 갑인시월칠일생 신유이월이십삼일간좌(貞夫人水原白氏之墓 甲寅十月七日生辛酉二月二十三日艮坐)’라고 쓰여 있다. 묘는 북동마을청년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생전에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소답동 910번지에 백영월의 공덕을 기리는 퇴기백영월영세불망비(退妓白映月永世不忘碑)가 세워졌다. 지금의 비석은 1977년에 창원시 북동 주민들이 다시 세웠으며, 원래의 비석은 파손되어 백영월 묘터 근방에 묻었다고 한다. 매년 음력 3월 18일 북동노인정에서 북동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