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875 |
---|---|
한자 | 洪鍾永 |
영어음역 | Hong Jongyeong |
이칭/별칭 | 응수(膺受)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경혜 |
[정의]
조선 말기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응수(膺受). 아버지는 홍재증(洪在曾)이다.
[활동사항]
홍종영은 1875년(고종 12) 응제부(應製賦)로 전시에 직부(直赴)되어, 같은 해 경과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 후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성균관 등의 관직을 거쳤다. 1886년 승정원동부승지에 특제되어 내무부 총무관,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안동부사, 성천부사, 영변부사, 중추원 2등의관, 궁내부 특진관, 궁내부 영선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880년에는 서장관으로 사은 겸 동지사 임응준(任應準)을 수행하여 청(淸)에 다녀왔고, 1890년에는 고부사(告訃使)로서 청에 다녀왔다.
1886년(고종 23) 전운어사(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세곡과 대동미, 잡세 등을 수송하는 임무와 농민에게 선가(船價)를 징수하는 관직)로 부임한 뒤 창원 지역에 와서 마을의 굶주린 백성을 위하여 돈 4천 냥을 기부하여 자그마치 108개 마을을 구제하였다. 조세를 처리할 때에도 공평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지 않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상훈과 추모]
1887년(고종 24) 8월 홍종영의 선정을 기리는 ‘전운어사홍공종영영세불망비(轉運御使洪公鍾永永世不忘碑)’가 세워졌는데,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용호동 용지공원 안에 보존되어 있다. 이 비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이수와 비신을 한 돌에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쪽으로 오신 공이 덕을 베푸시어 창원 백성이 더욱 큰 은혜를 입었네. 108마을 걸쳐 굶는 백성을 구제하려 돈 4천 냥을 기부하셨도다. 포구의 밀린 조세를 처리함에 있어 공평하게 처리하시었도다. 이 비 갈라져 없어지지 않으리니 꽃다운 행적은 백년을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