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8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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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容益 |
영어음역 | Yi Yongi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경옥 |
[정의]
조선 말기 창원부사를 지낸 무신.
[활동사항]
이용익은 1871년(고종 8) 평해군수로 나아갔다. 1876년 8월 창원부사로 부임하였다가 1878년 2월 전라좌수사로 옮겨간 후 이듬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가 1881년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90년 병조참판을 거쳐 1892년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1897년(광무 1) 정2품으로 있으면서 중추원1등의관이 되었다.
[상훈과 추모]
1878년(고종 15) 2월 이용익을 기리는 행대도호부사이후용익애민불망비(行大都護府使李侯容益愛民不忘碑)가 세워졌는데,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용호동 용지공원 안에 보존되어 있다. 『문화유적분포지도』-창원시 편에 의하면, 비석의 제작기법은 1910년대 이후 급속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한 일식비(日式碑)의 양식을 띠고 있으며, 1938년 제작되었다고 한다. 이를 종합해 볼 때 현재의 비는 1878년 2월에 제작된 비가 훼손 혹은 소실되어 1938년에 다시 제작한 것이 아닐까 싶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와야 할 백성 많음을 안타까워 해 이들을 편안케 하고 가까이 하려 했다. 녹봉을 내놓아 이들을 도와주고 땔감과 쌀을 모두 실어 주었도다. 폐단이 없다면 그대로 두었고 혜택이 있으면 골고루 입게 하였다. 성정은 얼음처럼 맑고 깨끗하며 봄햇살처럼 온화했네. 무슨 말을 빌려 말하리오, 가시는 길에 따른 이 애석함을! 공의 덕은 높고 끝없이 길도다. 입으로 비석으로 함께 전해지리라!. 무인년 2월 창원 5면의 백성들이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