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2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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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相頊 |
영어음역 | Gim Sanguk |
이칭/별칭 | 인숙(仁叔),물와(勿窩)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석산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정용 |
성격 | 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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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석산리 |
성별 | 남 |
생년 | 1857년 |
몰년 | 1936년 |
본관 | 상산 |
[정의]
조선 말기 창원 출신의 학자.
[개설]
김상욱의 자(字)는 인숙(仁叔), 호는 물와(勿窩)이다. 1857년(철종 8) 11월 24일 사시(巳時)에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석산리에서 출생하였다. 김상욱의 김씨계는 신라에서 출자하였으며, 고려시대 휘(諱)가 수(需)인 선조가 상산(商山)과 인연을 맺으면서 자손들이 세전해 오게 되었다. 여러 대를 지나 휘가 김후려(金後麗)인 선조가 관직을 버리고 상산으로 은둔하였는데, 절의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조선시대 목사를 지냈고 한성판윤에 추증된 김팽수(金彭壽) 때 창녕으로부터 김해로 이주하였다. 그의 손자로 승정원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선조 때 선무원종1등공신에 녹훈된 김명윤(金命胤)이 다시 창원 석산으로 이거하였다. 김명윤은 김상욱의 10대조이다. 김상욱의 증조할아버지 휘는 김호신(金護臣)이고, 할아버지는 김종엽(金宗燁)이다. 아버지의 휘는 김세원(金世源)이고, 어머니는 영산신씨(靈山辛氏)인 신지백(辛志伯)의 딸로 판서를 지낸 신사천(辛斯蕆)의 후손이다.
[활동사항]
동학농민항쟁이 발생한 갑오년, 즉 1894년에 김상욱은 세상의 혼란스러움을 피해 의춘(宜春)의 두곡(杜谷)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후 이 지역 사람들이 그의 덕행을 흠모하여 자제들을 보내 학문을 청하였다. 2년 후인 1896년 봄 동학의 형세가 대단해지자 김상욱은 다시 창녕의 화왕산 노동리 깊숙한 지역으로 이주하였다가 이듬해 1897년 가을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4년에는 도곡(道谷)의 친영(親塋) 아래쪽에 재(齋)를 건립하여 추모와 학문을 강론하는 장소로 삼았다.
만 60세 때인 1917년 겨울에 창녕의 계산(桂山)으로 이거하였다. 1920년 3월 창산(昌山) 지역 사림들이 관산서당(冠山書堂)에서 채례(采禮)를 행하였는데, 모인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 김상욱은 예를 마친 후 요청에 의해 자리에 올라 많은 유생들에게 강론을 하고 문답을 하였으나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1922년 김상욱은 조상의 묘소를 석물로 단장하였고, 1926년에는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이 때 족보를 다듬을 뜻을 품고 원근의 종족들을 모아 일을 주도하였다. 1931년 겨울에 다시 진양의 서쪽 내평리로 이거하였으며, 1936년 12월 17일 병환이 들어 같은 달 24일 인시(寅時)에 임천각(臨川閣)에서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부모를 섬기는 일과 제사를 받드는 일, 형제간의 우애, 종족간의 돈목 등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거가칠잠(居家七箴)」을 지었고, 독서·입지·존심·궁리·신독·일신·역행에 대한 「거숙칠잠(居塾七箴)」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소학』 한 질을 상하 두 권으로 번역하여 여러 자제(姉弟)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성설(性說)」 및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편찬하였으며, 「본연성기질성도(本然性氣質性圖)」와 「미발이발도(未發已發圖)」를 작성하였다. 57세 때인 1913년 4월에 중국을 다녀온 견문기인 「중주기행(中州紀行)」이 있다. 또한 예에 관하여 정리한 『예의고증(禮疑考證)』과 이기론을 중심으로 정리한 『성리유찬(性理類纂)』 및 강의(講義) 2부(二部)가 있다.
김상욱이 젊은 시절, 김해 사람이었던 이모 씨가 김상욱의 집을 왕래하면서 천문과 지리 및 복서(卜筮)와 산수·기술 등에 대해 배우기를 항상 권하였다. 그러나 김상욱은 응하지 않으면서, "나의 소원은 공자와 맹자 및 정자와 주자의 학문을 배우는 것……."이라고 하면서 "사업의 진정한 길은 이것에 있다."고 답하였다 한다. 이러한 학문적 입장에서도 나타나듯, 김상욱은 팔십 생애를 일관하여 성리학의 학문적 사상을 흠모하며 심도 있게 이해하고 도달하고자 노력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상욱의 장례를 치를 때 원근에서 모여 든 사람들이 30여 군에서 3,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