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2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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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孤雲崔致遠昌原-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박태성 |
[정의]
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학자로 중국과 신라에 모두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그는 신라 말기에 귀국하여 어지러운 당시의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남해안 일대를 유랑한 뒤 해인사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그의 유랑 경로 중 마산의 월영대는 매우 의미 있는 곳으로 이후 많은 문사들이 찾아 그를 기리는 시를 남겼다.
[황금시대 말기의 불운아 최치원]
고운 최치원은 중국의 황금시대라 불리는 당나라가 쇠퇴할 즈음에 12세의 나이로 중국으로 건너가 18세에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고병의 막하에 들어가 「토황소격문」을 지어 돌리니 황소가 그 격문을 보고 놀라서 혼이 나갔다는 일화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중국도 쇠퇴기에 들어 그곳에서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신라로 귀향하게 되었다. 신라 역시 한반도 역사상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통일기의 전성시대가 쇠퇴의 일로를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신라 사회는 부패와 부정이 만연하였고,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최치원의 의지는 시무책으로 왕에게 전달되었으나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특히 골품 제도의 한계에 부딪혀 최치원은 더 이상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수 없었다. 이에 벼슬을 그만두고 경주를 떠나 동해를 거쳐 남해안과 그 일대를 방황하다가 해인사로 들어가 행적을 감춘 이후 세상에서 사라졌다.
[남해안 유랑기의 행적]
최치원은 벼슬을 그만둔 뒤 경주를 떠나 동해안의 울산을 거쳐 남해안을 유랑하였다. 남해안에 최치원과 관련되는 많은 지명들이 있는데, 경주 동쪽의 울산을 거쳐 해안을 따라 기장을 지나 부산에 이르면 해운대와 몰운대 등이 있다. 부산광역시 강서구에서 창원으로 진행되는 경로에서 부산과 경계 지점에 청룡대가 있다. 청룡대는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가주동에 위치하는데 최치원이 이곳에 잠시 머물면서 낚시를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청룡대의 자연석 바위에는 ‘청룡대치원서(靑龍臺致遠書)’라는 최치원의 글씨로 여겨지는 각자와 표식 비석이 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면 창원시 성산구 적현동에 강선대(降仙臺)가 있는데, 이는 최치원의 신선과 같은 행적을 기려 ‘고운이 앉아 놀던 곳’이라는 의미로 붙은 것이라 전한다. 강선대에서 마산만을 건너면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에 월영대(月影臺)가 있다. 최치원이 이곳에 별서(別墅)를 짓고 놀았다는 것을 보면 이곳에 머문 기간이 다소 길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많은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최치원의 행적을 노래한 것을 보면 최치원과 실제 관련된 일화들이 많을 것이다. 월영대 남쪽에는 돝섬이라고 불리는 저도(猪島)가 있으며 월영대의 북쪽에는 무학산(舞鶴山) 학봉(鶴峰) 끝자락에 고운대(孤雲臺)가 있었다고 전한다. 저도에 남은 전설은 ‘저도에 달이 뜰 때마다 괴이스러운 돼지의 울음소리가 들려 최치원이 활을 쏘았더니 그 소리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는 요괴 퇴치 설화이다. 그러나 그 이외에도 가야의 공주가 돼지로 변했다는 설화 등도 남아 있다.
마산에서 서쪽으로 전진하여 경상남도 사천시 삼천포에 이르면 남일대(南逸臺) 해수욕장이 있는데, 남일대도 고운이 절벽에 서서 이 주변을 바라보고 남해안에서 제일이라는 의미로 명명한 것이라 전한다. 사천에서 서쪽으로 가면 경상남도 하동이 나오고 하동의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쌍계사에는 최치원의 글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쌍계사 진감 선사 대공 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라고도 한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이다. 쌍계사에서 방향을 전환하여 북쪽으로 이동하면 지리산 자락에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청학동에서 산청군 시천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최치원이 넘었다고 해서 고운 고개라고 한다.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덕천의 남명 조식(曺植) 유적지를 지나 북쪽으로 전진하면 경상남도 합천이 나온다. 합천 해인사가 최치원의 마지막 행적지이다. 이곳에 봄의 붉은 꽃잎과 가을의 붉은 낙엽이 물처럼 흐르는 계곡이라서 그가 명명한 홍류동 계곡은 현재 합천 해인사 소리길로 이름이 높다. 또 농산정 앞에 새겨진 ‘제 가야산 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라는 시도 유명하다. 이 뿐만 아니라 최치원이 지팡이로 쓰던 나무를 꽂아서 지금의 고목이 되었다는 전나무 전설을 비롯하여 많은 전설과 실재하는 유적을 남기고 있다. 최치원은 이곳 해인사에 은거한 이후 그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최치원 시무책의 현재적 조명]
최치원의 정치적 사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은 없다. 단지 894년에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 10여 조는 전해지지 않지만 그의 정치에 대한 마음을 읽게 하는 단서가 된다. 이기백은 최치원과 같이 신라 육두품의 후예인 고려 성종의 명신 최승로의 시무책을 토대로 하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과거제의 실시, 왕권의 강화 , 하급 귀족의 존중, 지방호족 세력의 발호 억제 등일 것이라고 추론하였다. 어느 시대이든 계급의 불평등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당시 골품 제도로 인한 사회적 폐단은 육두품인 최치원에게도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귀족과 평민, 조선 시대에는 양반과 천민으로 신분은 철저하게 분리되었고 그 안에는 인간성·경제성·사회성 등을 모두 차별하는 불평 부당한 기준이 들어있다.
현대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이다. 즉 모든 민중이 평등한 사회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자는 진골이며, 귀족이며, 양반이며. 힘없고 돈 없는 자는 평민이고 상놈이고 천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치원이 시무책을 올릴 때는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도전장을 낸 것이다. 그러나 실패했다. 그리고 벼슬을 버리고 더 이상 그들과 같은 집단에서 살지 않고 떠나버린다. 그가 길을 떠난 것은 도피일 수도 있지만 자신만의 참된 가치를 찾아 떠난 여행일 수도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고 권력을 지향하며 끝없는 도전을 하고 좌절하는 모습들이 도처에서 보인다. 그러한 여정 속에서 인간은 부재한다. 이러한 때가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위해 무엇을 추구하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 무엇에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인지를 찾는 여행을 떠나야 할 때가 아닐까?
[창원과 최치원의 관계]
최치원이 창원과 인연을 가진 것은 그가 말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바닷길을 따라 울산에서 부산을 거쳐 창원을 지나 사천·하동·합천으로 유랑하던 여정에 머문 것이다. 그는 현재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에 있는 월영대 주변에 별서를 짓고 그곳에 한동안 머물면서 일대를 완상하며 지냈다. 그가 머문 기간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떠난 후 고려의 정지상을 비롯하여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최치원의 흔적을 따라 월영대를 찾아와서 그를 기리는 시를 남겼다. 최치원을 문창후(文昌侯)라고 부른다. 그로 인하여 창원을 ‘문창(文昌)의 고장’이라고도 한다. 정지상 이후 월영대를 찾은 시인들은 김극기·채홍철·안축·박원형·정이오·서거정·김극성·정사룡·이황·이민구·박사해·손기양·신지제·조임도·이식 등 멀리서 찾아온 문사들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물론 김명륜·노경종·김병린 등 이 지역의 문인들도 월영대는 마음의 지향점과 같은 것이었다. 이들이 창원을 오고가면서 이 지역의 문단에 영향을 끼쳤을 것임은 재고할 여지도 없으며 창원의 학문과 문단은 그만큼 성장하였을 것이다.
한편 최치원과 관련된 이 역의 지명도 강선대·월영대·고운대 등 직접 관련된 이름뿐만 아니라 월영대의 이름을 딴 월영동과 반월동·월포동·완월동·신월동·월남동·두월동 등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면 고운은 마산 사람들의 정신의 줄기를 세우는 산맥으로 오롯이 작용하고 또한 마산의 실재 지명 속에서 더불어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