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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23
한자 韓國纖維産業-成長-沒落-馬山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석호

[섬유 공업의 탄생]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섬유 공업은 경남 마산에서 가장 번성하였다가 사라진 공업 부문이다. 마산 섬유 공업의 시초는 1920년으로 일제의 조선 회사령의 폐지로 섬유 공장들이 들어섰다. 1923년 마산 조면 공장을 시작으로 1930년대 들어 마산 상공 회의소와 시민들의 노력으로 조선 물산 주식회사, 조선 신흥 방직 주식회사 등 대형 섬유 공장들이 가동되면서 섬유 공업은 마산의 대표적인 산업으로 탄생하였다.

이중에서 조선 신흥 방직 주식회사는 자본금 27만 엔으로 마산부 산호리[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에 대형 공장을 설립하고 남녀 500여 명을 고용해서 직물 폐품을 수집하여 재생, 방직 제품들을 생산하였고, 이 공장의 규모나 시설은 일본 국내에서도 볼 수 없는 매우 우수한 시설이었다.

[해방 이후 마산의 섬유 공업]

일제 강점기 성장을 지속하였던 마산의 섬유 공장들은 해방 직후 한국인에게 넘겨졌다. 조선 물산은 고려 모직 주식회사로, 조선 신흥 방직 주식회사는 신흥 방직 주식회사로, 마산 조면 공장은 마산 면업 주식회사로 개편되었고, 1950년 대양 방직 주식회사가 새롭게 설립되면서 국산 양복지와 생사를 생산하였다. 특히 마산 신포동에 설립된 대동 제모 주식회사는 국내 최초로 신사용 중절모자를 생산하였고 이러한 업체들은 6·25 전쟁 이후의 각종 제조 업체보다 가동이 순조로웠다.

1961년 당시 마산에는 23개의 중요 섬유 업체들이 있었고 이들의 생산량은 모직 55만 2000마, 모사 360톤, 면직물 81만 마, 제면 8,126㎏, 수건 1만 매, 메리야스 138만 6500매 등이었다.

[섬유 공업의 변화]

모방직 중심의 섬유 공업이 중심을 이루던 마산의 섬유 공업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경제 체계에 맞추어 화학 섬유 중심의 섬유 공업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시기 한국 최대의 화학 섬유 제조업체인 한일 합섬이 1967년 1월 마산 양덕동에 23만 1400㎡ 규모로 설립되고, 남성 모방, 경남 가내 공업 센터, 개성 산업, 성림 산업 등 고용 인원 100명 이상을 갖는 섬유 제조업체와 보세 가공 업체들이 신설되었다. 마산에 기반을 둔 이들 업체의 당시 수출액은 1739만 달러로 1970년 마산시 수출 총액 1997만 달러의 85%를 차지하였고 제2차 경제 개발 계획이 시작되던 1967년에는 44개 업체[고용 인원 7,500명]로 확대되었다. 이때 연간 생산 실적은 78억 2000만 원에 달했다.

국가 주도하에서 생성된 화학 섬유 제조업체들의 경기 상승과는 달리 1950년대 마산의 주요 업체의 하나이던 동양 제모 주식회사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취임 이후 세계적으로 번진 탈모(脫帽) 유행에 밀려서 문을 닫게 되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순모 양복지를 생산했던 고려 모직 주식회사를 비롯한 모방직 제조업체들은 국내의 재벌 기업들이 이 업계에 진출하자 시장 쟁탈 경쟁에 밀려나게 되고, 이에 곁들여 수요자들의 구매 성향이 화학 섬유 제품으로 기울게 되자 시내 모방직 업체들은 1960년대를 넘기면서 점차 쇠퇴해 갔다. 이들의 쇠퇴는 마산 지역 섬유 공업이 화학 섬유 중심으로 얼마나 빨리 전환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산 자유 무역 지역의 가동과 창원 국가 산업 단지의 조성 등으로 종래 마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소규모의 면장갑 공장들이 새로운 업종으로 등장하여 1970년대 중반에 35개소나 생겨났다. 이들을 포함해서 1980년 마산의 섬유 업체 수는 무허가까지 포함해서 총 80여개 소에 이르렀다.

또한 부산에서 창설된 경남 모직 주식회사가 1979년 9월 봉암동 666[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에 대지 4만 9500㎡에 2만 3100㎡의 새 공장을 세우고 첫 가동에 들어갔다. 1979년 복지 740만 8000야드를 생산하여 이중 348만 3000야드를 수출하였다.

이처럼 한일 합섬·남성 모방·개성 산업·경남 모직 등 화학 섬유를 중심으로 재편된 섬유 산업은 향후 1980년대를 향한 마산 섬유 업계의 도약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유류 파동과 마산의 섬유 공업]

중화학 공업 중심 정책에서 파생된 화학 섬유 업체는 1971년 28개소, 생산 총액 275억 7000여만 원이었지만, 1973년 10월의 유류 파동에 따른 국제 경기 하락으로 대형 섬유 업체의 하청 공장과 보세 가공 공장들의 폐업이 잇따라 1980년에는 등록 업체 수는 12개소로 감소되었다. 한일 합섬·경남 모직 등 대형 섬유 제조업체 역시 1974년 한 해 동안 재고의 적체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품질 향상과 수출 대상국 다변화 노력이 주효하여 생산량은 꾸준히 증가했다.

1979년의 제2차 유류 파동으로 다시 한때나마 생산량이 감소했으나 1980년 마산 지역의 12개 섬유 제조업체의 총생산액은 2172억 7000만 원을 기록했다. 또 1980년 총 6개 업체에서 3억 8287만 6000달러를 수출하여 당해 마산시 총 수출액 4억 5843만 9000달러의 77%를 차지했다.

이와 같이 한일 합섬을 필두로 한 대형 회사들의 노력과 경남 모직 마산 공장의 신설, 홀치기 보세 가공 업체의 영업 신장은 두 차례의 유류 파동, 미국의 섬유류 수입 규제 압박과 같은 악조건을 딛고 나온 것으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두 차례 유류 파동과 미국의 수입 규제로 인한 수출 물량의 감소와 국내 경기의 침체 등으로 마산 섬유 업체는 시련기를 맞았다. 이런 와중에서도 한일 합섬이 1973년 11월 30일 수출 1억 달러 탑을 수상했고, 1979년 수출의 날에 수출 4억 달러 탑을 받는 명예를 안았다. 또 시내 해운동에 있던 화학 섬유 제품 수출 업체인 마산 방직 주식회사가 마산 양덕동 888-1의 대지 3만 1035㎡에 1,137㎡의 공장을 신축 이전하여 마산의 대기업으로 발전할 기틀을 마련했다.

[마산 섬유 공업의 둔화]

화학 섬유의 노동 집약적 생산 공정으로 육성되어 온 마산의 섬유 업계는 1980년대 전반까지는 마산 각 제조 업계의 생산 실적과 수출 실적 면에서 최고의 자리를 유지했다.

1986년 이후 생산 실적 면에서는 국가 산업 단지로 급성장한 기계 공업계에 수위 자리를 물려주게 되었으나, 수출 실적에서는 여전히 제자리를 지켰다.

1980년 마산시에 등록된 14개 섬유 제조업체의 종업원 수는 1만 6396명을 헤아렸으며, 총생산액은 2072억 7000만 원이었다. 그리고 이들 업체 중 6개 수출 업체의 수출 실적은 3억 8287만 6000달러로서 그해 마산시 일반 지역의 수출 실적 4억 5843만 9000여 달러의 77%를 차지했다.

1985년 말의 유가 하락 등 3저 호황을 맞아 1986년에는 섬유 업계의 마산시 등록업체 수는 16개사로 늘어났으나, 공장 자동화 등의 영향으로 종업원 수는 다소 감소하여 1만 3946명을 헤아렸고 총생산액은 3397억 5000만 원으로 증가했다. 섬유류 수출 실적은 4억 9012만 달러를 나타내어 마산시 일반 지역 수출 총액인 5억 6218만 1000달러의 89%를 차지했고, 일반 지역의 공산품 수출액 5억 4385만 3000달러의 90%를 점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같은 섬유 업계의 생산 실적이나 수출 실적은 거의 모두가 한일 합섬, 마산 방직, 경남 모직 등 3대 대기업에서 이룩한 실적으로 이 3대 기업의 생산 실적은 전체 섬유 업계 생산액의 99.66%, 수출 실적은 거의 100%를 차지했다.

그리고 3대 굴지의 소모방 생산 업체인 경남 모직은 1986년 3월 1일 본사를 부산으로부터 마산시로 이전하고, 이어 그해 11월에는 주생산 공장인 부산 공장마저도 마산으로 이전함으로써 향토 기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87년 이후 3저 호황 속에서 국내 경기 역시 상승 추세를 나타내고 있었으나 국내의 임금 상승과 원화 가치의 절상, 이에 곁들여 마산 섬유 경제가 노동 집약적 산업 구조에서 기계 공업을 중심으로 한 선진 공업국 구조로 전환해가면서 섬유 업계의 신장 추세는 둔화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시내 3대 섬유 회사의 수출 실적은 2년 전에 비해 겨우 8천여 만 달러가 증가한 5억 7357만 달러의 성과를 올렸다. 이 같은 실적은 시내 일반 지역의 총수출액 6억 8632만 8000달러의 85.4%를 차지했다. 그러나 1989년을 넘기면서 성장추세는 더욱 둔화되어 갔다.

한편 1973년에 시내 양덕동으로 이전한 마산 방직은 그 후 꾸준히 성장하여 연간 평균 5천만 달러 상당의 소모 방직 제품을 해외에 수출하여 마산의 유수 기업으로 성가를 높였으며, 1989년 상호를 대유 통상 주식회사로 바꾸어 조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기에 본사와 공장을 대전으로 이전하였는데, 그 이유는 마산시 관내 항만 부두의 기능 저하와 시내 주요 기관의 창원 이전에 따른 마산시의 인구 감소, 상권의 분산, 바구니 물가의 상승으로 인한 생필품 수요의 감소 등이다.

[마산 섬유 공업의 몰락]

일제 강점기부터 발전해온 마산의 섬유 공업은 1980년대의 호황 시대를 거치면서 1990년대 사양의 길을 걷는다. 1990년 마산시에 등록된 섬유 공업 통계는 14개 업체에 고용 인원 1만 160명으로 집계되었다. 1991년의 13개 업체에서 1993년까지 감소세를 보이다가 다시 1994년부터 증가하여 1995년에는 16개 업체로 늘어났다. 그러나 1995년에는 12개 업체에 고용 인원은 2,750명으로 등록되어 있어 고용 인원에서 큰 감소세를 나타냈다. 이에 따라 종업원 수, 생산액, 실가 가치도 감소하였는데, 다만 1996년에 와서 품질 및 상품의 다양화와 자동화로 1인당 생산량은 매우 신장되었다. 이들 업체 중 종업원 1천 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업체는 한일 합섬과 경남 모직 두 대기업뿐이다. 그리고 고용원 60여 명의 부산 방직과 47명을 고용하고 있는 청호 직물을 제외하면 그 외는 영세한 소기업체들이다.

노동 집약 산업으로 각광을 받아왔던 섬유 업계는 1980년대 후반 이후의 고임금 시대를 맞으면서 경쟁력이 약화되어 점차 위축되었다. 특히 고용 인원의 급격한 감소는 대기업들의 고용 시설 자동화에 따른 인원 감축과 한일 합섬의 공장 시설 시외 이전 등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마산의 한일 합섬도 섬유 산업의 위축 추세에서 예외일 수가 없었다. 1990년대의 문턱에 들어서면서 조여 오는 고임금의 압력과 물류 비용의 증가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생산 원가를 높이는 요인들에 의해 국제 경쟁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후발 중진국들의 국제 섬유 시장 진출 등 성장 장애 요건을 극복하기 위해 저임금 노동력의 확보가 가능한 해외 현지 공장의 설립을 서두르게 되었다. 1992년 2월27일자로 회사의 명칭을 ‘주식회사 한일 합섬’으로 변경했다. 1994년 4월에 중국 현지 방직 공장인 청도 한일 방직 유한 공사를 준공하고, 이어 그해 5월에는 인도에 소모 방직 공장을 준공했다. 다시 그해 8월 랑방 한일 방직 유한 공사에 이어 12월에는 한일 래리 방직 유한 공사를 각각 중국 현지에 건립하고 1995년 9월에는 다시 중국 방직 공장인 청도 한일 방직 유한 공사를 준공하는 등 해외 현지 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한일 그룹의 전성기 시절 한일 합섬의 본사가 있던 마산시 양덕동 마산 공장의 지리적 조건은 너무나 달라졌다. 마산시 도시 계획에 의거, 마산 공장의 주변 환경은 시가지로 변모했고 지가는 크게 올랐다. 당시 한일 합섬은 보다 값싼 외곽 지대의 땅을 물색하여 마산 공장의 이전을 계획했다. 1992년 2월 의령군에 의령 공장이 준공되자 마산 공장의 시설 일부를 이곳으로 옮겼다.

한일 합섬이 보유한 부지는 사원 기숙사, 연수원, 한일 여자 실업 고등학교, 사원 후생 시설 등을 합치면 총면적은 약 66만㎡나 되었다. 이 가운데서 기숙사, 기타 건물이 있던 일부의 부지에는 1992년 이후 기존 건물들을 헐고 한일 타운이라는 고층 아파트 단지를 조성한 것을 시작으로 연차적으로 아파트 단지를 조성했다.

마산의 대표 섬유 공장인 한일 합섬은 당시 자본금 967억 3000만 원, 연간 매출 5000억 원에 달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노동 집약적인 생산 방식, 3저 호황의 종료, 타 개발도상국의 도전 등 모든 면에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가 1998년 IMF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부도가 나고 만다.

한일 합섬의 부도는 마산 섬유 산업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상징성이 아주 큰 사건이었다. 이후 마산 지역의 섬유 공장은 가내 수공업 형태의 소규모 공장만이 남았고, 이들도 기계류 중심의 생산 설비로 노동 집약적인 섬유 공업의 번영은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마산의 시대별 대표 섬유 업체]

1. 주식회사 마산 조면 공장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는 혼다[本田安五郞]가 1923년에 조선 면화 주식회사 마산 공장을 인수해 시작한 공장이다. 1924년 부지 4,298㎡에 926㎡의 공장과 165㎡의 하치장을 신축하고 56대의 조면기와 부대시설을 갖추었다. 1934년엔 자본금 50만 엔(円)으로 법인 회사로 개편했다. 1935년 빈정[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포동]의 해안 매립지에 새로운 공장을 세우고 연간 18톤의 조면 능력을 갖는 시설을 마련했다.

이후 전시 체제가 되면서 원료인 원면 확보난으로 1941년에는 연간 생산량이 6톤으로 위축되었다. 구마산 상남동에 있는 제면부와 창원 내서면에 탈지면 공장을 세워 제면과 탈지면도 생산했다.

2. 오오다 마사 공장

1927년 6월 일본인 오오다[太田誠一]가 자본금 30만 엔으로 세운 특수 섬유 공장이다. 마산부 월영동에 부지 1만 6500㎡, 건평 3,305㎡의 공장을 세우고 정방기 400추를 시설했다. 연간 100만 엔 상당의 제품을 생산할 계획으로 시설했으나, 원료인 삼을 구하기 어려워서 1941년에 30만 엔가량의 생산품을 출고하는 데 그쳤다.

3. 조선 물산 주식회사

일본 오사카에 있는 주식회사 나까오 상점의 계열 회사였다. 이 회사 사장 나까오[中尾久次郞]가 1939년 4월 1일 마산부 오동동에서 자본금 18만 엔으로 설립하였다. 6,610㎡이나 되는 넓은 부지를 마련해서 건평 3,305㎡의 공장을 건립하고 직기 300대를 설치했다.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설립이 인가된 이 회사에서는 수출용 카펫과 기타 상품 등 연간 100만 엔 상당의 제품을 생산했다.

4. 조선 신흥 방직 주식회사

1940년 3월 15일 마산 상공 회의소에서 창업 총회를 갖고 자본금 27만 엔 전액 불입으로 설립되었다. 마산부 산호리에 대형 공장을 신축하고 남녀 500여 명을 고용해서 직물 폐품을 수집하여 재생 방직 제품들을 생산했다. 공장의 규모나 시설은 일본 국내에서도 볼 수 없는 매우 우수한 것이었다고 한다.

5. 고려 모직 주식회사

1939년 오동동에서 일본인에 의해 설립된 조선 물산 주식회사를 1947년 2월 15일 미 군정청 산하의 적산 관리청으로부터 한태일 등이 임차하여 고려 모직 주식회사를 설립, 모직물 생산 공장으로 전환해서 순모 양복지 생산에 착수했다. 1951년 위 연고자들이 불하받아서 이듬해 2월 새 동력 직기 50대와 염색 가공 시설 등을 새로 갖추었다. 그 후 생산 시설을 더욱 확충해서 순모 양복지를 생산하여 국내 시장에 판매했다.

6. 신흥 방직 주식회사

산호동 187에 있던 적산인 대형 재생 방직 공장 조선 신흥 방직 주식회사를 해방 직후 종업원 자치 위원회에서 관리 운영했으나, 좌익 적색분자들의 책동으로 노조원들의 파업이 계속되어 정상 조업이 불가능하게 되자 상공부에서 직할 공장으로 지정 운영했다.

1951년 이복수 등에게 1억 3500만 원에 불하되어 신흥 방직 주식회사로 새로 발족했다. 외국으로부터 대폭직기 58대, 소폭직기 38대, 정방기 2대, 카트기 3대, 뮬러기 2대, 그 밖의 가공 시설들을 신설해서 민수용 복지와 군수용과 관수용의 복지를 함께 생산했다. 월평균 생산량은 3만 마였다. 그러나 수요의 감소와 경영 적자 등으로 설립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

7. 마산 방직 주식회사

시내 해운동에 있는 적산 다다마사 공장을 한국인 관리인이 맡아 운영했다. 수입양모의 긴 섬유를 원자재로 하여 소모사(梳毛絲) 생산을 시작했으나 경영난으로 오래 가지 못해 상공부 직할 공장으로 가동했다. 1952년 3월 민간인에게 불하하여 상흥 섬유 합명 회사라는 상호로 마방직과 모방적을 생산하는 한편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모심지를 짰다. 1954년 5윌 자본금 100만 환으로 마산 방직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대표 이사에는 강신출이 취임했다.

8. 대양 방직 주식회사

1953년 3월 신포동 2가 100에서 자본금 200만 환으로 설립되고 대표 이사는 최정두가 맡았다. 이 회사는 월평균 양복지 1만 마와 모사 900㎏을 생산했다.

9. 동양 제모 주식회사

태평양 전쟁 종전 직전에 일본이 공장 건설을 추진하다가 중단한 신포동 2가의 공장 터에 1950년 6월 8일 손성수를 대표 이사로 하는 대동 제모 주식회사가 발족했다. 양모를 원료로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신사용 중절모자를 생산 판매했는데, 연간 생산량은 6만 개 내외였다. 뒷날 경영진이 바뀌고 대표 이사는 김근환이 맡았다가 다시 정공철로 바뀌었다.

10. 대명 산업 주식회사

1954년 유엔 한국 재건단[UNKRA] 자금 62만 달러를 기금으로 소모사 생산 시설 4,224추를 도입하고, 그해 4월 시내 양덕동 888번지에서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1956년 12월 10일 총부지 면적 7만 6000여㎡에 연건평 3,300㎡의 대형 공장을 완공하고 제반 생산 시설을 완비했다. 홍지관이 대표 이사였던 이 회사는 연간 100만 파운드의 소모사 생산 능력을 갖춤으로써 국내의 연간 소모사 수입액의 20%에 해당하는 200만 달러의 외화를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11. 신한 모직 가공 주식회사

마산 시내에 있는 5개의 모방직 회사가 합동으로 설립하여 대표 이사에는 김장호를 앉혔다. 이 회사는 유엔 한국 재건단 자금 50만 달러로 영국제의 모직물 가공 기계를 도입하고 내자 3억 3000만 환을 들여서 산호동 123 약 3만 3000㎡의 부지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모방 직물 염색, 가공 전문 업체이다. 염색 가공 능력은 월평균 약 10만m이며, 작업 종류는 복지 가공과 모사와 원모의 염색 작업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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