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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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熊川水軍僉節制使營 |
이칭/별칭 | 제포 진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제장명 |
제정 시기/일시 | 1486년 - 수군첨절제사영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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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시기/일시 | 1496년 - 웅천 수군첨절제사영 도만호로 차강 |
개정 시기/일시 | 1512년 - 우수영을 영등포로 이전[1510년]하였다가 다시 이전 |
개정 시기/일시 | 1544년 - 웅천 수군첨절제사영 만호진으로 차강 |
폐지 시기/일시 | 1895년 - 폐지 |
관할 지역 | 제포진성 -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안지개 마을 |
[정의]
1486년(성종 17) 창원[진해] 제덕동에 세워 운영되었던 수군 진영.
[개설]
웅천 수군첨절제사영은 1484년(성종 15) 숙의 조숙기의 발안으로 결정되어 1486년(성종 17) 진해 제덕동 안지개 마을에 설치된 수군 진성이다. 이곳은 수군첨절제사가 지휘한 경상 우도의 주진으로 기능한 곳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398년(태조 7)에는 제포 수군 만호진이 도만호로 승격되어 경상 우도 수군도안무처치사[뒤에 수군첨절제사로 개칭]를 두는 거진[경상 우수영]이 되어 휘하에 8개의 만호를 관령하였다. 즉 안골포·사량·당포·영등포·옥포·조라포·평산포·적량 등을 관할하였으나, 뒤에 절제사영이 부산 쪽으로 옮겨짐에 따라 수군만호가 남게 되었다. 1403년(태종 3)에는 수군 처치사를 두었다. 교린 정책으로 1407년(태종 7)에 제포를 개항하여 합법적인 무역을 허가하여 주었으나 왜인들은 불법 무역과 불법 입주자가 늘고 노략질도 여전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방관할 수 없어서 1419년(세종 1)에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치게 하고 우수영을 전방인 거제도의 오아포로 이진하고 왜와 통교를 단절하였다. 1425년(세종 7)에는 파하여 부만호로 차강하였다.
통교를 단절하자 곤궁해진 대마도주가 귀순해 와 1423년(세종 5)에 다시 개항을 해주고 1437년(세종 19)에는 웅신현을 웅신진으로 변경하면서 우수영을 다시 옮겨 왔고, 1443년(세종 25)에는 계해조약을 맺어 은전을 베풀었으나 위약을 하고 노략질이 여전하였다. 그러다가 내이포의 우수영 지휘관을 1466년(세조 12)에 절제사로 차강하였다. 왜인들의 행패는 군사력만 가지고는 방어하기가 어려워 1484년(성종 15) 숙의 조숙기의 발안으로 성의 축조가 결정되어 1486년(성종 17) 진해 제덕동 안지개 마을에 수군 진성을 설치하였다. 이것이 바로 경상우도 수군첨절제사영성이다.
[관련 기록]
당시 성의 규모는 『신증 동국 여지 승람』 성곽조(城廓條)에 “석축의 둘레가 약 1,306m[4,313]척이고 우물이 2개 있다”고 하였다. 『웅천현 읍지』에는 높이가 약 4.5m[15척]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웅천 수군첨절제사영이 관할하던 병선은 당시에는 유군 병선이 11척, 소기군 1,600명, 무군 병선 5척이었다. 첨절제사의 영이 있던 제포 진성은 제덕산 줄기가 서쪽으로 뻗은 경사면을 이용하여 정상부부터 능선을 따라 해안에 이르기까지 쌓은 것이다. 구조는 큰 자연석으로 이중 기단에 둘레는 1,377m가 되고, 너비는 4.5m, 높이는 2m로 추정된다. 성문은 동, 서, 북면에 곡성도 두었고, 요소에 성우와 치성을 두었다.
성내에 있었던 공해는 ‘제포 진지’에 의하면 객사 3간, 동헌 4간, 진교청 4간, 진무청 4간, 사부청, 포수청 4간, 사령청 2간, 폐문루각 2층 3간, 군기고 3간 등이 있었다고 하였다.
영조 때 읍지에는 제포에 회원루, 조종각, 수항루 등이 있었다고 하였고, 그 가운데 ‘수항루’는 삼포 왜란 때 왜인에게 항복을 받은 기념으로 세운 누각으로 추정된다.
[변천]
웅천 수군첨절제사영은 1496년(연산 2)에는 도만호로 차강하였다. 한편으로 왜인들은 성 밖에 거주하도록 제한된 장소를 왜관(倭館)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들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우리나라 관원들과의 마찰이 잦았다. 그러던 중 대마도주가 이끄는 왜인이 1510년(중종 5)에 삼포 왜란을 일으켜 제포진과 웅천현성을 함락하고 민가를 분탕질하여 우수영을 다시 영등포로 이진하였다.
1512년(중종 7)에 대마도주가 사죄를 해와 임신약조를 새로이 맺고 우수영을 다시 옮겨왔으나 1541년(중종 36)에 또 다시 왜인이 난동을 일으켜 왜구들이 섬이 많은 지형을 이용하여 출입을 하므로 1544년 전방인 가덕도로 거진을 옮기고 제포는 만호진으로 차강되어 구한말까지 존속하였다.
유적으로는 경상 우도 수군첨절제사 진영의 터, 만호 탁유상 선정비[1705년 건립], 안응규기념비[1938년 건립], 제포 왜관지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진해 제포 성지[경상남도 기념물 제184호]가 있다.
[의의와 평가]
창원[진해]의 제덕동에 있었던 수군진은 조선 초기 왜구의 방어와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한때 수군첨절제사가 지휘하였다. 따라서 이곳에 첨절제사영이 설치되어 자체 방어력을 높였다. 그만큼 제포진은 당시 왜구 방어를 위해 매우 중요시 되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