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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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薺浦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정용 |
제정 시기/일시 | 1390년 - 수군만호진 설치[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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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할 지역 | 제포 진성(薺浦 鎭城)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830~831번지 일대 |
[정의]
조선 시대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포(薺浦)에 설치되었던 군사 주둔 지역.
[개설]
제포(薺浦)에는 조선 초기에 우수영이 설치되었다가 얼마 후 경상우도수군첨절제사영(慶尙右道水軍僉節制使營)이 설치되었다. 제포에 설치된 진(鎭)은 군사상 방어의 필요성에서 지방의 요충지에 설치한 군사 주둔 지역으로 조선 후기에는 만호(萬戶)가 지휘하는 진해만의 해상 방어 기지가 되었다.
초기에는 제포(薺浦)에 성(城)이 축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적인 방어 상의 문제점이 제기되어 축성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 과정에서 1484년(성종 15) 사헌부 집의 조숙기(曺淑沂)의 계청으로 이듬해 우의정 홍응(洪應)을 순찰사로 삼아 경상우도와 전라좌도 지역의 축성 예정지를 살펴 삼포(三浦)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 22개소의 수군영진(水軍營鎭)에 성을 쌓기로 하였는데 그해 3월에는 이미 제포(薺浦)에 축성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제포 진성(薺浦 鎭城)은 1486년(성종 17)에 완성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제포(薺浦)는 웅천(熊川)은 물론 창원의 방어와 마산포(馬山浦)의 조운(漕運)을 확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전략적 위치 때문에 고려시대 말인 1390년(공양왕 2)에 경상도와 전라도 등 전국 연해 요지에 모두 만호(萬戶)를 두었는데 당시 이미 별장(別將)이 주둔해 있던 내이포(乃而浦) 즉 제포(薺浦)에도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이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기록]
제포 진성(薺浦 鎭城)에 대하여 『웅천읍지(熊川邑誌)』에는 어변정(禦邊亭), 회원루(懷遠樓), 조종각(朝宗閣), 수항루(受降樓)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내용]
제포(薺浦)는 1437년(세종 19)부터 1544년까지는 종 3품의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두는 거진(巨鎭)이 되었고 안골포, 사량포, 당포, 영등포, 옥포, 조라포, 평산포, 적량진을 관장하였다. 삼포왜란 후 만호진으로 강등되었다. 만호진으로 된 후로는 무관 종 4품의 만호를 수장으로 그 아래 진리(鎭吏) 10인, 지인(知印) 7인, 사령(使令) 4명이 배속되었다. 군선은 전선(戰船) 1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이 배치되었다.
[변천]
제포진(薺浦鎭)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제포 진성(薺浦 鎭城)을 축조하였다.
진해 제덕동 830번지와 831번지 일대의 제포 진성(薺浦 鎭城)은 제덕동 안지개 마을의 낮은 야산 서쪽 경사면을 이용하여 정상부로부터 능선을 따라 해안에 이르기까지 축조하였다. 큰 자연석으로 이중기단을 조성하고 동·서·북의 정방(正方)에 옹성형 문지(甕城形門址)를 두었고, 성벽의 요소마다 곡성(曲城)을 구축하였다. 외부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깊이 5m내외, 폭 5~9m내외의 해자(垓字)를 둘렀는데 총연장 1,377m, 폭 4.5m, 높이 2m 내외의 평산성(平山城)이다.
성내에는 객사(客舍), 동헌(東軒), 진교청(鎭校廳), 진무청(鎭撫廳), 사부청(射夫廳), 포수청(砲手廳), 사령청(使令廳), 군기고(軍器庫) 등이 있었고 남문 밖에는 왜인을 접대하고 통상을 하던 왜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의의와 평가]
제포진(薺浦鎭)에는 한동안 경상우도수군첨절제사영(慶尙右道水軍僉節制使營)이 설치되어 있었던 사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조선 시대 제포진(薺浦鎭)은 마산포(馬山浦)의 조운(漕運)을 보호하고 웅천(熊川)은 물론 창원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국가 안보의 측면에서 전략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