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7164
한자 安珦
이칭/별칭 안유(安裕)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남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243년연표보기 - 안향 출생
활동 시기/일시 1260년 - 안향 교서랑 부임
몰년 시기/일시 1306년연표보기 - 안향 사망
출생지 안향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군
묘소|단소 안향 묘소 -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대덕산동
사당|배향지 소수 서원(紹修書院)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
사당|배향지 임강 서원(臨江書院) - 경기도 장단군 북면 고랑포리
사당|배향지 회헌 영당(晦軒影堂) - 전라남도 곡성군
성격 고려 시대의 문신
성별
본관 순흥
대표 경력 첨의참리 세자이보(僉議參里世子貳保)|첨의시랑 찬성사 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판밀직사사 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

[정의]

고려 후기 동남도병마사로 합포[현 창원시 마산]에 출진했던 학자·관료.

[가계]

본관은 순흥.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아버지는 밀직부사 안부(安孚)이며, 어머니는 강주 우씨(剛州 禹氏)로 예빈승 우성윤(禹成允)의 딸이다. 처음 이름이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과 같았으므로 이를 피해 처음 이름인 로 다시 고쳐 불렀다.

[활동 사항]

안향(安珦)[1243~1306]은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을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 항쟁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여 1272년에 감찰어사가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 판관(尙州判官)으로 있을 때 백성들을 현혹하는 무당을 엄중히 미신을 타파하였다. 그뒤 판도사 좌랑(版圖司左郞), 감찰 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 사업(國子司業)으로 승진했다. 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1289년 2월에 정동행성의 원외랑(員外郞)이 되고, 얼마뒤 좌우사 낭중(左右司郎中)이 되고 고려 유학 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그해 11월에 왕과 왕비(원나라 공주)를 시종하여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직접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이듬해 돌아왔다.

1294년 동남 도병마사가 되어 합포(合浦)로 출진했고, 이어 지공거가 되고 같은 해 12월에 지밀직사사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밀직사사로 승진했다. 1296년에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겼다. 1297년에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里世子貳保)가 되었다.

1298년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인 충선왕이 즉위하자 관제를 개혁하여 집현전 태학사 겸 참지 기무 동경 유수 계림 부윤 (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 참리 수문전 태학사 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1300년 광정대부 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가 되고, 얼마 뒤에 벽상 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난징으로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문묘에 사용할 제기(祭器)와 악기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사서 등을 구해오게 했다. 또한 왕에게 청해 문무 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 인재 양성에 사용하도록 했다. 같은 해 12월에 첨의시랑 찬성사판 판도사사 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1304년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해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 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 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학문과 저술]

원나라를 오가며 학풍을 견학하고, 또 직접 주자서를 베껴오고, 주자학의 국내 보급을 위해 섬학전을 설치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다하여 우리나라 유학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볼 수 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안향은 그의 이상을 학교 재건과 인재 양성을 통해 이룩하려 하였다. 당시 고려의 시대 상황을 자각하고 주자학이 가진 이념이나 주자학 성립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의식, 당시 고려의 위기를 구하려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여러 교육적 활동을 전개했으므로, 단순한 의미의 주자학 전래자라기 보다는 ‘주자학 수용자’로서 유학사(儒學史)에 자리매김할 수 있다.

[묘소]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지는 충렬왕이 하사하였는데, 경기도 장단군 대덕산이다.

[상훈과 추모]

1318년(충숙왕 5)에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하여 안향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문묘에 배향되었다. 소수 서원, 임강 서원, 회헌 영당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