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1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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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以吾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남재우 |
출생 시기/일시 | 1347년 - 정이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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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434년 - 정이오 사망 |
묘소|단소 | 정이오 묘소 -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 |
사당|배향지 | 구암 서원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 284-19 |
성격 | 고려 말 조선 초기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진주(晉州) |
대표 관직 | 예문관 대제학|영의정[추증]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는 구암 서원에서 향사하는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우곡(愚谷)이다. 아버지는 정신중(鄭臣重)이고, 아들은 정분(鄭苯)이다.
[활동 사항]
정이오(鄭以吾)[1347~1434]는 문과에 급제하여 1376년에 예문관 검열이 되고, 공조와 예조의 정랑, 전교부령 등을 역임하였다. 1394년(태조 3) 지선주사(知善州事)가 되었고, 이첨(李詹)·조용(趙庸) 등과 함께 군왕의 정치에 도움이 될 만한 경사(經史)를 간추려 올리고, 곧 봉상시 소경(奉常寺少卿)이 되었다. 1398년 조준(趙浚)·하륜(河崙) 등과 함께 『사서 절요(四書節要)』를 찬진(撰進)하였다.
1400년(정종 2) 성균관 악정(成均館樂正)이 되었으며, 병조 의랑(兵曹議郎), 예문관 직제학, 예문관 사성을 역임하였다. 1403년(태종 3) 대사성으로 승진하였고, 1405년 3월에 김과(金科)와 함께 생원시를 관장하였다. 1409년 병서 습독 제조(兵書習讀提調)를 거쳐 동지춘추관사를 겸임, 『태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13년 『태조실록』 편찬에 대한 노고로 예문관 대제학이 되면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였다. 1418년 72세로 치사(致仕)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태실 증고사(胎室證考使)가 되어 진주 각처를 다녔고, 속현인 곤명(昆明)을 태실소로 정하게 하였다. 노성(老成)한 덕이 있다 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젊어서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의 문인과 교유하였고 늙어서는 성석린(成石璘)·이행(李行)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정이오는 시(詩)에 재능이 뛰어났다 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선 태종의 명으로 『태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413년에 예문관 대제학과 지공거를 겸했으며, 세종 때에 성균관 대제학과 의정부 찬성사에 이르렀다.
[학문과 저술]
저술로는 『교은집』, 『화약고기(火藥庫記)』 등이 있다.
[묘소]
묘는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에 있으며, 1997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에 있는 구암 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