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1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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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震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남재우 |
출생 시기/일시 | 1569년 - 박진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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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41년 - 박진영 사망 |
출생지 | 박진영 출생지 - 경상남도 함안군 하리 |
사당|배향지 | 여산 서당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중리본동길 28[중리 977] |
성격 | 조선 중기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밀양 |
대표 관직 | 순천 군수|평산 도호부사|숭정대부 판돈령부사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부도총관[추증] |
[정의]
조선 중기 창원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실재(實哉), 호는 광서(匡西). 시호는 무숙(武肅). 아버지는 증 형조 판서 박오(朴旿)이다.
[활동 사항]
박진영(朴震英)[1569~1641]은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활쏘기·말타기에 능하여,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수 유숭인(柳崇仁)과 함께 의병을 모아 왜적을 무찔렀다. 군자감 참봉에 이어 첨정이 되었다가 초유사 김성일의 천거로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장수로 용맹을 떨쳤다. 그 공으로 선무 원종공신 2등을 책록되었다.
1599년(선조 32)에 용궁현감에, 1613년(광해군 5)에 경흥 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임지에 있으면서 북방의 방어에 주력한 공로로 절충장군에 올랐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별장으로 종군하여, 신경원(辛景瑗)과 힘을 합하여 동교에서 격파하였다. 이어 평산 도호부사가 되어 해서 방어사(海西防禦使)를 겸임하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박진영의 후손이 지은 장군의 실기인 『광서 실기(匡西實記)』가 전한다.
박진영의 유물 및 유품이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내인리 밀양 박씨 영동정공파(令同正公派)의 종손 박성길(朴性吉)씨 집에 소장되어 있는데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되어 있다. 박진영이 평소 사용하던 유품과 명나라 제독으로부터 받은 장려패문(奬勵牌文) 등 모두 231점이 소장되어 있다. 유품 중에는 교지·분재기·토지 문서·노비 문서·호구 단자·송사 문서·입안 문서·간찰 등 각종 고문서가 들어 있어, 조선 후기 사회 경제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상훈과 추모]
선무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여산 서당에서 향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