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1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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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남재우 |
출생 시기/일시 | 1382년 - 정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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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52년 - 정분 우의정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454년 - 정분 사망 |
출생지 | 정분 출생지 - 경상남도 진주시 대안리 |
묘소|단소 | 정분 묘소 -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 |
배향지 | 충렬사(忠烈祠) -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계산리 |
배향지 | 구암 서원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1동 284-19 |
성격 | 조선 전기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진주(晉州) |
대표 관직 | 우의정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 서원에서 향사하는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유(子㕀),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다. 할아버지는 정신중(鄭臣重)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정이오(鄭以吾)이다.
[활동 사항]
정분(鄭苯)[1382~1454]은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나가 경승부승(敬丞府丞)에 이르렀고, 1416년(태종 16)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조 좌랑·승문원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422년(세종 4) 사간원 우헌납이 되었고, 이어 좌헌납·병조 정랑·의정부 사인에 올랐다. 1428년 함길도 경차관(咸吉道敬差官)으로 파견되어 수재 상황을 살폈다. 1429년 사헌부 집의에 올랐다. 1432년 승정원 우부대언에 발탁되었다. 이후 좌부대언·우승지·좌승지가 되었으나, 곧 부상으로 사직하였다. 1436년 충청도 감사가 되었고, 1438년 이조 참판·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443년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7년에 좌참찬으로 숭례문 건축공사를 감독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우찬성에 오르면서 계속 판이조사를 겸임했고, 충청도·전라도·경상도 도체찰사가 되어 연변주현(沿邊州縣)의 성터를 살폈다. 1452년(단종 즉위) 김종서(金宗瑞)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주도한 계유정난으로,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정분도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가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이후 대신과 대간의 빈번한 청죄(請罪)가 계속되었지만, 1년 여간 목숨을 보존하다가 1454년 사사(賜死)되었다. 문신이지만 토목에 조예가 깊어, 세종 말에서 단종 초에 걸쳐 궁궐 조성·축성, 현릉(顯陵)[문종의 묘] 조성 등에 공헌이 있었다. 1746년(영조 22) 김종서·황보인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묘소]
묘는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에 있으며, 1997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786년(정조 10) 장흥 충렬사에 배향되었고, 1791년 장릉(莊陵) 충신단에 배식(配食)되었다. 1804년(순조 4) 충신을 표창하기 위하여 집 앞에 정문을 세웠다. 구암 서원에서 매년 3월말 정(丁)일에 향례(享禮)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