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11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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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且性-德行談 |
이칭/별칭 | 효자 창정비 이야기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노성미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대티리 중촌 마을에서 훌륭하게 가정을 세운 소년 가장에 대한 이야기.
[개설]
「황차성의 덕행담」은 13세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어 부모께 효도하고 조카들을 잘 보살펴 가정을 훌륭하게 다스린 황차성의 덕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8년 마산 문화원에서 발행한 마산 향토 사료집 『감동으로 적신 효성』에 「효자 창정비」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진북면 대티리 중촌 마을 도로변 금산리 들판에는 1977년 건립된 효자 창원 황공차성 창정비(孝子昌原黃公且性彰旌碑)가 있으며, 비의 뒷면에 만재 황기완이 찬한 비문이 있다.
[내용]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대티리에 황차성이 살았다. 그의 자는 치봉(致奉) 또는 치명(致明)이며 본관은 창원이다. 그는 1909년 진북면 정현리에서 출생하여 1969년 59세로 생을 마쳤다.
어려서 가난하여 겨우 7세에 나무하며 밤으로는 글을 읽더니, 13세에 맏형이 부득이 일본으로 도항하게 되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양친 시봉과 함께 강보에 싸인 두 질녀의 양육까지 맡아야 했다. 이때부터 온갖 노력을 감당하며 생활을 이어나갔다. 매일 시장에 나무를 내다 팔아 부친을 위해 고기를 구하고 반찬을 지어 올렸다. 결혼하여서는 그의 처도 부모에 대한 효성과 가정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된 생활고에서도 부모의 근심을 만들지 않으려고 언제나 안색을 화하게 하였다.
부모를 잘 봉양하여 그의 부모는 나이 들수록 건강하였으며 회혼일이 다가왔다. 이웃에서 그를 칭찬하여 서로 부조하여 회혼례를 거행하게 했다. 질녀들을 다 출가시킨 후 형이 일본에서 돌아오니 형과 아우의 우애가 극진했다.
전쟁이 나자 형제가 번갈아 가며 부모를 업고 거제도까지 피난을 갔다. 자신은 포대로 옷을 지어 입고도 부모를 극진하게 편안히 봉양했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견결한 제수로 지성을 다하였다. 그의 아름다운 행실을 칭찬하여 문종으로부터 표창이 있었고 향리에서도 그를 표창했다.
[모티프 분석]
「황차성의 덕행담」의 주요 모티프는 ‘어린 나이에 가정을 보살피고 부모에 효도하다’이다. 소년 가장이 가난한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부모를 봉양하고 가정을 훌륭하게 세운 이야기다. 현대 이야기이므로 하늘이 돕는 기적은 없었지만 형제의 우애와 노력은 가정의 행복과 이웃의 표창으로 보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