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11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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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台鳳里李仁喆-孝行談 |
이칭/별칭 | 태봉리(台鳳里) 행원각(行源閣)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정헌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8년 - 「태봉리 행원각」 『감동으로 적신 효성』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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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행원각(行源閣) -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태봉리 |
성격 | 구비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이인철 |
모티프 유형 | 효행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태봉리의 구비 전설.
[채록/수집 상황]
『감동으로 적신 효성』[마산 문화원, 1998]에 「태봉리(台鳳里) 행원각(行源閣)」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태봉리의 행원각에는 조선 말기 이인철(李仁喆)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가 있다. 이인철의 자는 명진(名震)이고 1857년(철종 8) 지금의 진동면 동전리에서 전주 이씨 완창 대군(完昌大君)의 후예로 태어났다. 그는 유복자로 출생하여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효도를 다하였으니 1905년 광무 9년에 정려가 내리고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의금부 도총관이 증직되었다. 「행원각기」에는 그의 효행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옛 칠원골 구산방의 동전리에 전주 이공 인철은 진실로 효자였다. 그는 1857년 6월 8일에 태어났으니 바로 그 아버지가 죽은 다음 날이었다. 철이 들면서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아버지 초상을 그려 중당에 모시고 조석으로 문안을 드렸다. 또 어머니를 극진히 섬겨 조금이라도 뜻에 거스름이 없었다. 그러다 겨우 15세 되는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몹시 애통해하여 피눈물로 삼년상을 지냈다. 장성해서 외롭게 제삿날을 맞을 때마다 부인 김씨와 함께 음식을 넉넉히 장만하여 정성껏 모시고 제삿날 저녁에는 사모하고 애통해하기를 항상 돌아가신 날 같이 하니 이웃들이 감탄하여 교관에게 상을 품신하기에 이르렀다.
[모티프 분석]
「태봉리 이인철의 효행담」의 주요 모티브는 ‘이인철의 효행’이다. 얼굴도 모르는 부친의 초상화를 그려 매일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15세에 모친까지 여의게 되자 삼년상은 물론이고 매년 기일마다 애통해 하는 마음이 변치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