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110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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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金氏褒彰碑-孝行談 |
이칭/별칭 | 김유인 효행 기적비(金孺人孝行紀蹟碑)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평암리 상평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경희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8년 - 「김유인 효행 기적비」 『감동으로 적신 효성』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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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김유인 효행 기적비(金孺人孝行紀蹟碑)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평암리 상평 마을 |
성격 | 구비 전설|효행담 |
주요 등장 인물 | 조일승|김해 김씨|시어머니|시아버지 |
모티프 유형 | 빈한한 집안에서의 삶과 시부모의 병구완이라는 효행담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평암리 상평 마을에 세워져 있는 효부 김해 김씨 포창비(孝婦金海金氏褒彰碑) 속의 효행담(孝行談).
[채록/수집 상황]
마산 문화원에서 1998년에 발간한 『감동으로 적신 효성』에 「김유인 효행 기적비(金孺人孝行紀蹟碑)」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
김유인 효행 기적비(金孺人孝行紀蹟碑)에 기록된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효부인 김씨 부인의 관향은 김해로 충정공 우황의 8세 손 되는 영배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순하고 아름다웠으며 효도로서 소문이 자자하였다. 조일승(曺馹承)에게 시집와서는 집안은 가난하고 부모님은 연로하여 능히 맛있는 음식을 제공할 수 없어서 부인은 남의 집에 길쌈을 하여 그 삯으로 시부모를 봉양하였다. 그러던 중 시부모님이 우연히 천식병을 심하게 얻게 되어 점차 위독하게 되었다. 부인은 눕히거나 일으키거나 나가고 들어 올 때마다 약재를 달여 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드리는 것을 반드시 자신이 몸소 하였다. 밤이면 하늘을 우러러 보고 시부모님의 병과 자신을 대신하여 주십사 하고 14년을 하루같이 기도 하였으며, 그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소생시켜 드렸더니 시어머님이 말하기를 “내가 오늘까지 부지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자부의 효성 때문이다.” 하였다.
또 시아버지께서는 생전에 술을 즐기셨으니 항상 준비하여 두고 빠진 적이 없었다. 여름이면 부채질을 서늘하게 하여 드리고, 때로는 야간에 눈썹을 붙여 보지 못하기도 하였다. 또한 등에 종기가 나서 백방으로 약을 시험하여 보았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자 마침내 빨아서 정상을 회복하게 되기도 하였다. 연세가 92세에 병이 위독하자 역시 피를 흘려 넣었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곡립하고 상장하기를 전번의 시어머님 상시와 같이 하였다. 상기 중에도 여가 있는 날을 이용하여 반드시 생전에 즐겨 자시던 음식을 상식으로 드릴 때에 갖추어 놓고 마치 살아 계실 때 봉양하던 정성과 같이 하였더니 이웃 마을에까지 감동하여 말하기를 “김씨 부인의 효성은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하던 것이다. 세상도 또한 옛날 같지 않은데 아깝구나.” 하고는 모두가 상품을 주고 포양(襃揚)하는 상장을 주니 부인은 사양하여 말하기를 “나는 나의 자식 된 직분을 하기도 오히려 능히 다하지 못하였는지 두려운데 이런 것이 어찌 나에게 해당되리오.”하였다. [하략]
[모티프 분석]
「김해 김씨 포창비속의 효행담」은 전통 사회 시부모를 봉양하는 데 있어 ‘효행의 가치관과 미덕’을 오롯이 담고 있다. 김유인 효행 기적비(金孺人孝行紀蹟碑)에 나타난 이 이야기의 주요한 모티프는 빈한한 집에 시집을 오게 된 부인이 지극정성으로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의 병을 구완하는 ‘효행담’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