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A01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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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귀산동 석교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정헌 |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삼귀사람(귀현, 귀곡, 귀산 세 마을 사람을 일컬음) 하면 섬[島]사람부터 연상되었다. 마을 앞은 바다요 뒤는 험준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어 타지 사람들에겐 섬 아닌 섬사람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196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귀산동의 면적은 10.6㎢에 인구는 3700여 명이었다. 바다를 끼고 있어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30여 세대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주로 조개류를 채취하며 농사를 지었다.
다른 농촌 지역 같으면 쌀과 채소류에 의존하여 학비를 조달하겠지만 이곳은 주로 어패류를 잡아 충당하였다. 그래서 살기에는 아무래도 농사만 짓는 농촌 지역보다는 어패류가 풍부하고 값 또한 좋아서 삼귀 같은 농어촌 마을이 나은 편이었으나, 마산과 진해와 통하는 육로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도로가 뚫려 섬사람이란 인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이 마을 사람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육로가 뚫리기 전까지 삼귀사람들의 육지 연락선으로 ‘웅남호’란 조그만 배가 있었지만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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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남호
육로를 개설할 수 있는 곳으로는 남쪽과 북쪽이 있으나 남쪽으로는 해군통제부와 한국함대사령부, 해군공창, 해군신병훈련소, 해군 탄약창 등 중요 군사시설이 밀집되어 있어 어렵고, 북쪽으로는 귀현 앞산을 넘어 적현으로 가려면 산을 겨우 넘어 갈지(之)자 형태로 갈 수 있지만 문제는 적현에서 신촌까지였다. 그곳은 높이 50m, 길이 300m의 암벽이 가로놓여 있었으며, 거기에다 바다에서 거의 80도나 경사져 있었다.
당시 그곳 사람들이 직접 바위를 깨고 비끼고 하여 꼬불꼬불한 소로(小路)를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마을의 동맥 구실을 하기엔 턱없이 협소하여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폭을 갖춘 육로 개설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예산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러던 1966년경에 낭보가 들려 왔다.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김성은 씨와 지역 국회의원과 유지 등의 도움으로 도로 개설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도로를 뚫는 데 필요한 불도저 같은 중장비는 진해 해군통제부에서 제공한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꿈인지 생시인지 마을에 육중한 불도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모두들 큰 구경이 난 것처럼 흥분했다. 정말 가슴 설레는 일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드디어 섬사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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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산업도로 기공식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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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산업도로 기공식 기념사진
그러나 도로 개설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진해의 동섬에서 귀산본동까지 길을 내기 위해서는 산을 통과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는데, 여기로 길을 내기 위해서는 부득이 산의 소나무를 베어 내야 했다. 군청에 벌채 허가부터 내야 하는데, 벌채를 하면서 허가를 내면 된다는 담당자 말만 믿고 벌채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마산일보』 기자 2명이 찾아와 신문에 기사를 내겠다고 협박하면서 돈 몇만 원을 요구하였다. 소주 1되에 140원, 담배 1갑이 20원 하던 시절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결국 무허가 벌목으로 기사화가 되고 이를 받아 적은 『동아일보』, 『신아일보』, 『경향신문』, 『산업경제신문』 등에도 기사가 게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당시 마을 이장인 이종현 옹이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고, 그 해 12월 23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에서 무허가벌채 나무값 7,940원, 벌금 6,000원의 약식명령을 받아야만 했다. 물론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거두어 벌금을 냈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또 불도저가 산60번지를 지날 무렵 산주인 모씨가 “내 땅은 못 민다.”고 하면서 불도저 앞에 주저앉은 일도 있었다. 설득을 거듭한 끝에 무사히 지나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모씨의 논을 지날 때 그 부인이 장비 앞에 드러누웠다. 전 모씨가 부인이 쓰고 있던 수건을 손목에 걸고 당기고 밀고 하여 작업을 하게 된 일도 있었다. 487번지 밀밭을 지날 때는 연로한 땅 주인들이 저지하므로, 설득을 시켜서 하기도 하고 그 부분만 미루어 두고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마을 아이들은 매일 30~40명씩 나와 구경한답시고 몰려들기도 하였다. 이런 어려움을 겪고서야 비로소 산38번지까지 1차 산업도로가 완료되었다.
그 때가 1966년 5월 30일이었다. 비로소 진해 해군통제부 앞에서 귀산까지의 3㎞ 구간이 도로 평균 폭 5m 정도로 정비된 것이다. 이 도로가 완성되니 차에 포도를 싣고 마산과 진해가 아닌 부산이나 대구까지 시세가 좋은 곳을 찾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부산과 대구 등은 청과시장이 소규모여서 제법 시장 규모가 큰 마산과 진해에서 판매하였다.
이렇게 차라는 것을 구경도 못하던 곳에서 자동차에 물건을 싣고 가고 싶은 데로 갈 수도 있고, 섬 아닌 섬사람의 오명도 벗은 것은 오직 모든 마을 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람으로 도로를 완공했기 때문이다.
[정보제공자]
이종현(남, 1935년생, 귀산본동 거주)
황은준(남, 1933년생, 석교마을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