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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유년기의 추억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A030202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귀산동 석교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정헌

“당시는 무엇 때문인지 몰랐지만 국민학교 운동장 한편에 고구마밭이 있었고 운동장 주변에는 피마자(아주까리)를 심고 매일 가꾸었는데, 세월이 지나 알고 보니 일본놈들이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제. 심지어는 소나무의 진까지 긁어 모아서 학교로 가져오게 하기도 하고 ‘도둑놈(도둑놈같이 식물의 열매가 몸에 달라붙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이라는 풀의 열매까지 가지고 오게 했어. 이것 역시 기름을 짜서 총이나 대포 등에 쓰였다나. 매일 선생님한테 이것들을 갖다 주어 검사를 받았는데, 혹시 미달되는 학생이 있으면 벌로 학교 청소는 물론 심하면 매를 맞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 일제강점기에 국민학교를 다녔던 이종현 옹의 회상이다.

이종현 옹은 일제강점기 당시 삼귀국민학교[현 두산중공업 자리]를 다니고 있었다.

학교에서 기르는 고구마와 피마자 등에 퇴비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하루에 몇 ㎏씩의 풀을 가져오게 해서, 당시에는 풀을 베어 학교에 짊어지고 가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당시 국민학교에서 주로 가르친 과목은 국어(일본어)와 산수, 주산 등이었으며 조선말은 배우지도 쓰지도 못하게 하였다. 만약 조선말을 쓰는 학생이 있으면 당번이 그 학생의 이름을 적어 선생님께 일러바치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아예 조선말은 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선생님들도 모두 일본 사람들이었는데, 허리에 칼을 차고 있어서 엄청 무서웠다고 한다.

수업시간에는 선생님들이 매일 칠판 앞에 일본과 조선이 모두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는 지도를 펼쳐놓고는 내일 모레 손을 들어도(패전해도) 마치 이길 것처럼(승전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일과였다. 당시 교복은 검은색이었는데, 대개 목화로 지은 무명옷에다 검은 물을 들여서 입었다. 염색은 주로 물개동(물개똥) 열매로 했다고 하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이종현 옹의 부인이 요즘은 물개동이 아니라 오리목으로 부른다고 한 마디 거든다.

이종현 옹은 어릴 적 놀이 중에 기억에 남는 것으로, 국민학교 때 마을 앞에 있는 토마토밭과 수박밭 서리한 것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종현 옹은 “그때만 하더라도 양식이 귀할 때여서…….” 하고 말머리를 잡는다.

당시 마을에는 국민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이 대여섯 명 있었는데, 주로 모이는 곳이 일본에서 살다 온 이름을 알 수 없는 맘씨 고운 아주머니 집이었다고. 요즘으로 치자면 아이들의 아지트 격이었단다. 이곳에서 밤에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주 모였는데, 그 집 아주머니는 엿을 잘 만든다고 아이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어느 날인가 아이들이 집에서 각자 쌀 한 되씩을 가져와 아주머니께 엿을 고와 달라고 부탁하자 거절하지 않고 고와 주었다. 엿을 고아 저녁 내 먹고, 미처 엿을 만들지 못한 쌀은 불어서 집으로 가져가지도 못해 부득이 닭에게 먹였는데, 닭도 너무 쌀이 흐물흐물해선지 먹지를 못해 다들 배를 잡고 웃었단다. 이 엿을 깨서는 몇날 며칠 주머니에 넣고 학교에 다니면서 먹었다. 친구들이 “너그들 뭐 먹노?” 하고 물어도 차마 말을 못하고 우물우물 씹고 다녔다고. 쌀 한 되에 엿이 한 양재기나 되어 며칠이 지나도록 다 먹지 못했다면서 이종현 옹은 허허 웃는다.

석교마을에 거주하는 홍태식 옹은 어릴 적 바닷가에서 가재며 쏙이며 조개잡이로 한 철을 지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웃 진해만이 매립되지 않아 마을 앞에는 갯벌이 많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물이 나가면 온 마을 사람들이 바다에 나가 조개를 잡는 것이 일과였다고. 그 중에서 쏙을 잡는 방법을 재미있게 들려준다.

가재같이 생긴 쏙잡이가 마을에서는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는데, 쏠쏠하게 재미도 있고 하여 놀이 삼아 쏙잡이를 했다고. 쏙은 갯가 어느 곳에나 있는 것이 아니고 파도가 많고 포구가 형성된 곳에서 주로 많이 서식한다. 흔히 ‘몰밭’이라고 부르는 진흙 반 모래 반의 중간 토질에서 서식하는 갑각류이다.

쏙을 잡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가장 전통적인 쏙잡이 방식은 진흙밭(뻘밭)에 구덩이를 미리 파두는데, 이때 조심할 것은 절대 다른 흙이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이 구멍마다에 된장과 딩겨(기)를 섞어 조금씩 넣는다. 그러고 난 후 벼를 탈곡한 대[幹]심을 구멍에 넣는데 길이는 20~30㎝ 정도다. 그 끝에다 토끼털이나 소 꼬리털과 같은 짐승 털을 감아서 붓 모양으로 만들어 구멍 속에 넣었다 뺐다(올렸다) 하면 쏙이 이 맛 때문에 올라온다고. 그러면 양 손으로 움켜잡아 끌어올리기도 하지만 자주 쓰는 방법은 이 쏙을 유혹하는 ‘사냥 게’의 뒷다리를 붓 모양으로 만들어 잡는 방식이라고 한다.

이 쏙을 잡으면 10개씩 묶어서 솥에 삶아 마산 어시장 등에서 판매했다. 삶을 때는 반드시 솥 밑바닥에 대나무를 얼기설기 걸치고 삶는데, 요즘 생각해 보니 삶은 것이 아니라 찌는 것이었다고. 홍태식 옹은 지금은 찾을 수도 없는 쏙의 쫄깃한 맛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입맛을 다신다.

[정보제공자]

이종현(남, 1935년생, 귀산본동 거주)

홍태식(남, 1955년생, 석교마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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