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C03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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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봉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홍수정 |
봉산마을의 줄당기기는 자여마을에 속한 4개 자연마을(봉산마을·송정마을·용정마을·단계마을)이 모두 참여하는 큰 행사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1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자여역이 폐지된 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옛날 자여역에서 근무하던 찰방이 줄당기기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자여마을의 줄당기기는 마을과 마을 간의 대항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경기는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여 봉산마을과 송정마을 그리고 용정마을과 단계마을이 편을 이루었다. 줄당기기를 할 때면 어느 편에서 어느 줄을 잡느냐에 따라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찰방은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본인이 거주하고 있던 단계마을이 유리한 입지를 가질 수 있게 편법을 쓰기도 했다고.
그 시절 줄당기기의 줄판은 봉산마을 서편 하천 옆에 조성된 봉산리 43번지와 45번지, 15번지를 가로지르는 길목을 따라 형성되었다.
줄판은 일반적으로 동편에 암줄을 두고 서편에 수줄을 두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여마을에서는 이와 반대로 동편에 수줄, 서편에 암줄을 둔다. 이는 찰방이 줄 배치에 관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줄판이 들어서면 찰방은 그 중앙에 위치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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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줄당기기 판, (구)자여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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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줄당기기 판, (구)자여장터
“그때는 이쪽이 수줄이고 저쪽이 암줄인데, 어디를 가도 동편에 암줄을 두고 서편에 수줄을 두거든. 근데 자여줄은 안 그랬어. 우리(봉산마을과 송정마을)가 암줄이었어. 한 번은 줄을 당기는데 송정·봉산마을이 다 이겨 가는데 줄이 끊어져 버렸어. 그랬더니 찰방이 이 승부는 무효라고 외치고 다시 줄을 엮으라고 명했거든. 그렇게 끊어진 줄을 다시 정리해서 줄을 당기는데 그 줄이 짧아서 수줄만을 가지고 당기기도 했거든. 그래 찰방이 승부가 다 난 경기를 무효화시키기도 했어(황봉광, 남, 90세).”
“줄당기기를 할 때는 암줄을 당기면 손해 보는 게 많아요. 목이 끼이기도 쉽고 안기기도 쉽기 때문에. 씨름할 때도 목을 안 안길려고 하잖아. 암줄은 아무래도 안기기가 쉽거든……. 그래서 자여줄은 찰방이 관여를 해서 송정과 봉산마을이 당기는 쪽은 암줄을 배치하는 거래. 그래 찰방이 경기에 참여를 해서 많이 망쳐놨어.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서편이 계속해서 암줄을 당기고 있어(황봉광, 남, 90세).”
농촌사회에서 줄당기기의 승자 마을은 풍년이 든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 때문에 한 해 농사로 그 해 살림살이가 결정되는 당시 줄당기기의 승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찰방이 마을 줄당기기에 관여해서 부당한 편법으로 단계마을이 유리하게 경기를 조정하는데도 봉산마을과 송정마을 주민들은 찰방의 권력이 무서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찰방은 그 시절 마을에서 최고의 권력을 지닌 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함부로 불만을 토로하지도 못하였으며, 찰방이 시키는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여역이 사라진 한동안도 자여마을의 줄 배치 방향은 바뀌지 않았다. 대신 줄을 한 번 당기고 나면 서편에 있던 마을이 동편으로, 동편에 있던 마을이 서편으로 이동하여 줄을 당겨 가급적 불만을 없애고자 하였다. 오늘날에는 쌍줄에서 외줄로 줄의 형태가 바뀌어 이러한 문제는 사라지고 없다.
[정보제공자]
황봉광(남, 1919년생, 봉산마을 거주)
김문학(남, 1925년생, 봉산마을 거주, 송산노인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