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E03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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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외감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정용 |
외감마을은 전통적 모습을 지니고 있는 농촌마을로서 창원시 북면의 최남단에 있다. 창원시가지 서북쪽 산맥을 이루는 천주산 북쪽 산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이며, 마을 가운데는 달천계곡으로 이어진 큰 내가 흐른다.
100여 호가 살아가는 비교적 큰 농촌마을이다. 도시화가 되어 많은 변화가 있음에도 전통적 인심이 살아 있는 마을이며, 경관이 빼어난 천주산과 달천계곡은 마을의 자랑이다. 도시민의 휴양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며 마을의 아늑한 정취를 탐내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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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산에서 본 외감마을
아름다운 마을을 물려받게 된 것은 크고 작은 시련에도 굴하지 않았던 선조들의 피나는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마을엔들 시련이 없었을까마는 특히 외감마을에는 수난의 고초가 심했다. 물론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러나 전후 세대인 필자는 태풍 사라호가 안겨 준 시련을 크게 기억한다. 태풍 사라호로 마을의 모습이 크게 바꿔 버렸고 그 피해가 엄청나 오래도록 마을의 시련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라호의 엄청난 피해를 이겨내 준 마을 어른들의 모습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1959년 9월 18일자 『동아일보』 3면에 "추석날 노두(路頭)에 2만 수재민, 물에 삼키운 가옥7천-삼남지방교통·통신두절-백여 명 생사불명"이라고 난 기사를 보면 그 피해가 전국적으로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1904년 한반도에서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규모가 큰 태풍으로서 사라호는 남해안을 상륙하여 경상도 지역에 막대한 해를 입혔는데, 태풍의 경로에 들어 있던 외감마을도 사라호를 피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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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동아일보』 기사
태풍 사라호는 필자가 7세이던 1959년 9월 17일 추석날 아침에 외감마을을 사정없이 덮쳤다. 태풍이 오면 농경지가 침수되고, 초가지붕들이 바람에 날리는 등 크고 작은 해를 입게 되지만 태풍 사라호는 그 강도가 심하여 온 동네의 모습을 바꿔 버렸다.
그 전만 해도 마을 가운데 흐르는 개울가에 돌로 쌓은 정연한 제방과 물살의 힘을 낮추는 낙차공이 군데군데 있었고, 마을의 큰깍단과 작은깍단이 개울 제방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징검다리로 서로 오갔다.
그런데 태풍으로 쏟아진 폭우는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개울물을 범람케 하여 제방길과 개울가 집들을 쓸어 버렸다. 예전의 마을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온 동네가 쑥대밭이 된 것이다. 물론 바람에 지붕이 날려가고 물살에 소가 떠내려가고 가재도구가 쓸려간 피해와 농경지가 매몰된 피해도 말할 수 없을 만큼 컸지만,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온 동네가 쓸려간 피해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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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깍단과 작은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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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천
사라호가 안겨다 준 피해가 너무 커서 자력으로 복구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었다. 그렇지만 오늘날과 같지 않는 시절이라 자력으로 복구하는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을 다시 일구고 살아야만 하는 소명에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여 마을 사람들은 네 일 내 일 가리지 않고 일치단결로 길을 다시 열고 제방을 다듬었다. 그러나 임시방편에 불과한 자력복구에 지나지 않아 매년 폭우가 쏟아지면 피해는 반복되었고, 여러 해 동안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 때마다 온 동네가 합심하여 어려움을 지겹도록 견뎌내야만 했다. 오랜 시련을 겪은 후에, 정부의 지원으로 여러 차례 제방이 정비되고 다리도 놓여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큰 시련을 이겨 낸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터전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각오와, 이곳에서 자식을 키워 후손에게 온전한 삶의 터전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의지하고 정을 나눌 수 있는 미덕을 온 동네가 품고 있었기에 그 큰 어려움도 참아낸 것이리라! 이웃을 챙기고 오가는 길손을 편안하게 맞아 주며 소박한 삶을 꾸려가고 있는 지금의 외감마을에는 옛 어른들의 인고가 이와 같이 서려 있는 것이다. 옛 어른들의 인고를 딛고 터를 다듬은 외감마을은 이제 아늑한 농촌 마을로 자리 잡아 천주산과 달천 계곡을 찾는 관광객에게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