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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항기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전국적인 농민운동 중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전개된 운동.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고종 31)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으로 갑오농민운동 또는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당시 조선은 대외적으로나 내부적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주도해왔던 청(淸)나라의 몰락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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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국권 강탈 이후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창원 지역에서 이루어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 시기. 1. 마산 1914년 3월 1일 부·군제의 실시와 함께 창원부 외서면 마산포 일대는 마산부로 개칭되었다. 당시 마산포의 인구는 2만 3000여 명에 불과하여 부(府)의 기준에 미달하였다. 그러나 마산항의 병참 기지로서의 중요성과 대일 교역상의 입지적 특성이 중시되어 부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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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창원의 마산포를 외국인에게 개방하여 거주와 무역 등을 가능하게 한 사건. 1876년 일본과 수호 조규를 체결하고, 1880년대에 들어와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과 잇따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은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호를 열게 된다. 문호의 개방은 1876년 동래의 부산포, 1880년 덕원의 원산포, 1883년 인천의 제물포 등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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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이 한반도 주변 해역을 방어하기 위해 1910년부터 1922년까지 진해에 건설한 군항. 일제는 1904년 러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대규모의 군대를 한국에 진주시켰다. 창원·마산·거제 등 진해만 일대 주요 지역을 사실상 강점하고 여기에 해군 방비대 등 임시 군사 기지를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거듭한 끝에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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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이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 지역에 미친 영향. 러시아와 일본은 19세기 말에 서구 열강의 압력을 받으며 제국주의 국가로 변하고 있었다. 일본은 1894년에서 1895년에 걸친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국과 만주 지역에 대해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지만 곧 러시아의 견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에게 할양된 랴오뚱[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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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웅천현 지역에 1912년 일본 해군 군항이 들어서며 붙여진 명칭의 유래. 진해 지역은 1452년(문종 9)에 웅신현(熊神縣), 완포현(莞浦縣), 천읍부곡(川邑部曲)과 창원 남산 일부를 합하여 웅천현이 된 이래 조선 시대에 계속해서 웅천현(熊川縣)으로 존재하였다. 1895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실시된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전국 행정 구역이 23부 336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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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의 군사 도시이자 근대적 계획도시로 건설된 일제 시기의 진해. 경상남도 창원시로 통합되기 전까지의 진해시 지역은 조선 시대에는 웅천현(熊川縣)이었으나 1912년 1월 웅중면 전부와 웅서면의 일부를 통합하여 진해면(鎭海面)으로 개편하면서 ‘진해’라는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이 지역에 일본 해군의 군항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를 가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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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마산포의 개항에 따라 무역 등에 종사하는 여러 나라 외국인들이 거주·영업할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 1876년 일본과 수호조규를 체결하면서 문호를 개방한 한국은 1890년대에 들어와 열강의 세력 균형을 위해 교류를 확대하려는 정부의 정책과 무역 확대에 따른 이익을 노린 외국의 요청이 맞물리면서 개항장·개시장(開市場)을 확대해 나갔다. 1897년에 증남포와 목포를 추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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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군용 철도로 사용하기 위해 1905년에 완공한 삼랑진에서 마산포를 잇는 철도 노선. 일본은 1904년 2월 대규모의 군대를 한반도에 진주시켜 주요 지역을 사실상 강점한 상태에서 뤼순[旅順]항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이어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한국을 일본의 동맹국과 같은 지위로 만드는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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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항 이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일대에서 술과 여자를 팔던 유곽(遊廓). 경상남도 창원시에는 1899년 마산항의 개항과 더불어 일본인들이 들어와 집단으로 거주하였다. 1915년경부터 일본 최하층에 속하는 자들이 구 마산 수정 일대에 자리를 잡고 청루업[성매매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가난한 집 여자아이들을 방직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고 거짓으로 꾀어 온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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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의 공중목욕탕에 얽힌 일화. 1940년대 인구 2만 명이 넘지 못한 신구 마산 지역에는 공중목욕탕이 성업하였다. 대표적으로 신마산 일본인 거주지의 불노탕(不老湯), 앵탕(櫻湯), 구마산의 상반탕(常盤湯), 명호탕(鳴戶湯)이 있었으며, 오동동에 조선인이 경영하던 곳이 있었다. 1960년대에는 오처탕, 오동동 입구 오동탕, 그리고 청락탕 자리에 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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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와 마산합포구에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소유였던 농지나 주택, 기업 등의 재산을 미군정에 몰수하여 이승만 정부의 정책으로 이 귀속재산을 불하[매각]한 것. 마산에서도 일본인이 독점적으로 관리해 왔던 시내의 모든 제조업체들이 미 군정청의 손을 거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기술 부족과 자재난, 전력난...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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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부터 해방 전까지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설치된 행정 구역. 조선 시대의 마산은 창원부 혹은 창원군에 속한 작은 포구에 불과했다. 1760년(영조 36)에 마산포에 조창(漕倉)이 설치되고 세곡(稅穀) 운송에 따른 상품 유통량이 늘어나면서 마산포는 동래의 부산포(釜山浦), 김해의 칠성포(七星浦)와 더불어 경상도의 유력한 포구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함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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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지역에 설치된 행정 구역. 창원시로 통합되기 전까지의 진해시 지역은 1452년(문종 9)에 웅신현(熊神縣), 완포현(莞浦縣), 천읍부곡(川邑部曲)과 창원 남산 일부를 합하여 웅천현이 된 이래 조선시대에 계속해서 웅천현(熊川縣)으로 존재하였다. 1895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실시된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전국 행정 구역이 23부 336군으로...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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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 지역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개되었던 항일 운동. 1910년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조선인의 저항을 막고 영구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무단 통치를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전역은 수탈과 착취 아래 놓였고 조선의 백성들은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항쟁하였다. 창원 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청년 운동·문화 운동·3·1 만세 운동·농민·노동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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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운동 때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1. 마산 지역 일제 강점으로 인한 억압과 수탈은 일부 매판자본가·기생지주(寄生地主)들을 제외한 우리의 대다수 민중들을 몰락과 고통으로 몰고 갔다. 마산 지역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는 마산에 1909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 마산 출장소를 설치하고, 농민들의 토지 박탈과 고율의 소작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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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1일 경상남도 창원 지역의 구마산 장날에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 1919년 3·1 운동이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마산 지역[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와 마산합포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3월 3일 오전 11시쯤 두척산[무학산]에서 고종 황제 국장 행사에 모인 시민들에게 조선 독립의 당위성과 항일 궐기를 고취하는 연설과 함께 독립 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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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3일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진전면·진북면 3개 지역 주민이 연합하여 봉기한 만세 시위. 1919년 3월 28일에 일어난 진동면 고현 의거를 뒤이은 만세 시위다. 고현 의거에서 검거되지 않은 변상태, 변상헌, 권영대, 권태용 등이 비밀리에 삼진 의거를 도모하였다. 진동면을 비롯한 진전면과 진북면 일대의 지도자들이 대거 가담했다. 거사일을 음력 삼월 삼짇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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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에서 일어났던 독립 만세 운동. 상남면 항일의거는 1919년의 3·1운동에 호응하여 같은 해 4월 29일 오후 1시 창원군 상남면 마산헌병대 사파정(沙巴丁)분견소로부터 남쪽으로 약 400m쯤 떨어진 진해~창원 간의 대로상에서 학생·청년을 중심으로 하는 50여 명의 군중이 상남면의 장날을 이용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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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진해 지역에서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국치일(國恥日)을 맞이하여 격문이 뿌려지고 포스터가 붙은 사건. 1930년 8월 29일 국치일을 맞아 진해 웅천면과 웅동면 일대에서 항일 운동을 고취하는 격문이 뿌려졌다. 일제 강점기 기록인 ‘고등 경찰관 계적록’[1919~1935]에 의하면 “일한 병합 기념일 당일, 9월 2일, 9월 22일의 3일에 걸쳐 창원군 웅천면 박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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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진해 지역에서 일어난 독서회 조직을 통한 항일 투쟁. 일제 강점기 진해 이동에는 역사가 오래된 야학이 운영되고 있었다. 1930년대 이 야학에 교편을 잡고 있었던 사람으로 문맹근, 박홍목, 박영수 등이 있었다. 이들은 진해 공립 보통학교의 졸업 동기생이며 진주 사범학교 특과를 졸업하고 이 마을에 살면서 향토애와 조국애로 의기투합하던 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오산 중학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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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군 창원읍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창원읍 항일의거는 1919년의 3·1운동에 호응하여 같은 해 3월 23일과 4월 2일 창원읍 장날에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을 말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0년에 걸쳐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설치와 더불어 헌병경찰제를 통한 무력을 앞세워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직접 통치를 단행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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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 지역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대파한 청산리 전투의 승전 소식을 실은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한 사건. 평화적으로 진행된 1919년 3·1 운동이 일제의 강력한 무력 진압에 막혀 실패로 끝나자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군들의 무장 투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독립군 토벌을 위해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전투에서...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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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국기 창원 지역에 설립된 지방 은행. 농공 은행은 대한 제국의 일본인 재정 고문 메가다가 식민 정책의 하나로 농업, 공업의 개량 발달을 위한 자금 대부를 표면적 이유로 내세워 설립을 추진하였다. 설립을 위한 자금은 일본 흥업 은행으로부터 조달하려 하였다. 이는 일본 흥업 은행으로 하여금 농공 은행의 운영권을 장악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일본 흥업 은행은 농공 은행이 발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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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항 개항기인 1906년 6월 마산 창포동 3가에 설립된 어류 위탁 판매 회사. 마산항 개항기에 일본인이 자본금 2만 원으로 설립한 근대적 주식회사로 주로 일본인을 상대로 영업하였다. 1년간 양륙(揚陸)고는 35만 6220㎏[94,992관]으로 부내 어업 종사자는 122명이었다. 거래는 어업자 이외 다른 사람이 시장에 반입, 경매로서 인수하였다. 중매인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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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조약’에 따라 한국의 외교권을 명박탈한 일본이 통상·외교 관련 업무를 담당하도록 마산 지역에 설치한 관청. 1905년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제국주의 일본은 같은 해 12월 '통감부급이사청관제(統監府及理事廳官制)'를 공포하여 중앙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한편, 각 지역의 일본 영사관은 이사청으로 개편하도록 하였으며, 이듬해 2월 통감부와 이사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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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설립된 부산 본감 소속의 마산 분감으로서 현재 창원 교도소의 전신.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시설을 갖춘 최초의 감옥은 1908년에 문을 연 서대문 형무소이다. 일제가 조선의 사법과 감옥에 관한 업무를 행사하게 된 것은 1907년 7월 한일 협약에 따른 것이다. 이완용과 조선 통감이 사법·감옥 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를 조인했고 이에 따라 일제는 1907년 11월 통감부 재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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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마산포의 개항과 함께 관세의 부과와 징수, 조계지의 토지 경매 등의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개설된 부산 세관의 마산 출장소. 세관[당시 명칭은 해관(海關)]은 조선 말기 개항장(開港場)·개시장(開市場)에서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의 부과 및 징수를 담당하던 부서로서 무역 및 외국인 거류지와 관련된 행정업무를 담당하던 감리서(監理署)와 함께 개항장·개시장에 필수적인 관청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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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마산포의 개항과 함께 일시적으로 창원에 설치되었던 일본 영사관의 분관. 영사관(領事館)은 외국에 주재하면서 자국민을 보호·감독하고 통상을 촉진하는 것을 업무로 하는 외교기관이다. 한국이 1876년 한일수호조규를 맺어 문호를 개방하기로 하고 같은 해 동래의 부산포를 제일 먼저 개항함에 따라 콘도 마스키[近藤眞鋤]가 부산관리관(釜山管理官)으로 파견되어 영사업무를 수행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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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항기 경상남도 마산에 있었던 최초의 금융 기관. 일본의 제일 은행은 일제의 조선 침략에 첨병 역할을 담당한 곳으로, 1905년[을사늑약] 일본인 재정 고문에 의해 화폐 개혁이 단행되었고 신-구 화폐의 교환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많은 금융 자산을 수탈당해 심각한 금융 공황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때 화폐 개혁을 전담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07년 마산 지역에 최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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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마산포의 개항에 따라 창원 지역에 설치되어 통상·외교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관청. 감리서(監理署)는 조선 말기 개항장(開港場)과 개시장(開市場)에서 무역 및 외국인 거류지와 관련된 행정 업무를 담당하던 부서로서 수출·수입 상품에 대한 관세의 부과 및 징수를 담당하던 해관(海關)과 함께 개항장·개시장에 필수적인 관청이었다. 1883년 8월 부산·원산·인천에 처음 설치되었으...
노동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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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신인회 주도로 1923년 3월 14일 마산 노농 동우회가 창립되어 노동절 행사와 노동 운동 지원 활동, 노동자의 파업과 분규를 중재하는 임무를 수행한 단체. 1923년 5월 1일 제37회 노동절을 맞아 마산에서도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이 행사에 오학선, 강덕보 등의 마산 노농 동우회 관계자와 이정찬, 김기호, 손문기 등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시가행진하였다. 여기에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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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마산 부내에 산재한 노동 단체가 마산 노동회와 마산 인쇄 직공 조합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 1920년대 이후 수많은 노동 조합과 노동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는 이들의 사소한 경제 투쟁마저 탄압하였기 때문에 개별 노동조합의 분산적인 투쟁은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지역을 포괄하는 지역 연맹 조직을 건설하게 되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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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마산 지역에서 결성된 직업별 노동 조합. 1925년 5월 마산 인쇄공 조합이 결성되어 같은 해 11월 부산 인쇄 직공 조합의 총파업에 이어 다음 해 3월에 총파업을 벌였다. 인쇄 직공들의 쟁의는 활발하였으며 상호 부조에도 적극적이어서 1926년 3월에는 이 시기 각지에서 전개된 인쇄 직공들의 연속 파업 투쟁을 기반으로 전조선 인쇄 직공 총연맹이 결성되었다. 19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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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지역에서 소작농과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 등이 설립한 단체. 노동자의 인격 향상과 상식 증진, 근검절약과 친목 및 상호 부조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중앙의 조선 노동 공제회 창립과 동시에 각 지방에 지회가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마산 지역에는 마산 지회와 삼진 지회 및 구산 지회 등이 설립되었다. 이후 마산 지부는 1922년 10월 조선 노동 공제회로부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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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진해에서 노동 계급의 단결과 노동 운동을 펼치기 위해 조직된 단체. 진해 노동 청년 동맹은 1925년 창립하였다. 1927년에는 진해 제4 청년 동맹과 진해 노동 청년 동맹은 취지가 비슷하여 두 단체의 협의한 결과 합치기로 하였다. 1926년 11월 3일에는 경남 진해 노동 청년 동맹의 제3회 정기 집행 위원회는 진해 청년 회관에서 우두만 사회 하에 개최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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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창원 지역의 농민 운동 단체. 1920년대 중반 이후 농민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전국 각지에는 수많은 농민 운동 단체들이 생겨났다. 특히 1930년대 초반에는 농민 운동 단체가 급격히 증가했다.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개량적 농민 단체에서부터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된 혁명적 농민 조합에 이르기까지 그 성격은 다양했다. 농민 운동의 내용에서도 생존권 확보 투쟁에서...
청년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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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창원 지역에 결성되었던 청년운동 단체. 남면청년동맹은 창원군 남면 지역에서 활동하던 남면청년회와 신흥청년회 두 청년단체의 동맹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19년 12월 5일 창원 지역에서 제일 먼저 결성되었던 남면청년회는 1925년 1월 신흥청년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러나 몇몇 회원들은 계속 남면청년회라는 명칭으로 활동함에 따라 신흥청년회와 남면청년회의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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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창원 지역에서 최초로 결성된 청년운동 단체. 남면청년회는 지역의 교육, 문화, 산업, 농촌 생활 개선, 체육 장려 등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19년 12월 5일 안준(安浚)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1921년 조선청년회연합회에도 속해 있었다. 1925년 1월 남면청년회는 신흥청년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이후에도 남면청년회라는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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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지역의 기독교 청년 운동 단체. 공려 청년회(共勵靑年會)는 1911년 김윤경, 이순상 등에 의해 창립되었다. 마산 교회의 청년 조직인 공려 청년회(共勵靑年會)는 이윤재 등 교회 청년들에 의해 면려 청년회로 개칭되었다. 마산 구락부와 함께 마산 지역 ‘문화 운동’의 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종교 활동 외에 강연회 토론회를 활발히 개최하여 교육의 보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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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지역의 분리 되어 있는 여러 청년 단체들이 마산 청년 연합회에서 발전적 해소로 결성된 단체. 조선 청년 운동의 방향 전환기를 맞아 같은 사상과 정신 아래 여러 개의 청년 단체의 분리 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인식하에 마산 청년 동맹이 결성되었다. 마산 청년 연합회는 정우회 선언 이후 민족 운동의 전국적인 방향 전환기를 맞아 1927년 4월[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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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지역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4개 단체가 연합하여 만든 단체. 일제하 사회 운동의 발전에 따른 결과로서 신간회 마산 지회 이외에도 일제의 탄압에 효율적인 대처를 위해 마산 지역 각종 청년 단체들이 연합하여 결성하였다. 1925년 9월 26일 마산 수양 청년회의 발기로 마산 청년회, 어시장 공조 청년회, 형평 청년회의 4개 단체가 연합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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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지역에서 ‘문화 운동’의 구심적인 역할을 한 청년과 노·장년층, 민족주의자와 친일적인 인물이 섞여 다양한 성격을 가진 단체. 마산 청년단에서는 마산 지역에 운동장이 없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해 김지철(金知喆), 이윤재(李允宰), 손문기(孫汶岐), 김인숙(金仁淑), 김재○(金宰○), 박성우(朴成宇) 등이 발기하여 1920년 9월 8일 오후 3시 마산 원(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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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6월 마산 구락부의 청년부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단체. 마산 청년회는 마산 구락부의 재산을 넘겨받으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마산 청년회의 활동은 마산 구락부의 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계몽의 내용에 반제·반봉건사상, 특히 사회주의 사상이 많이 포함되었다. 창립 이후 마산 청년회는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으나 조선 공산당 창립 이후 활기를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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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창원 지역 청년들을 계몽하기 위해 설립된 청년단체. 신흥청년회는 계급의식의 촉진, 미혹적 인습의 타파, 조직적 단결 도모를 강령으로 설립하였다. 1925년 1월 26일 남면청년회에서 새롭게 회명을 고치고 새로운 활동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남면청년회의 회원 중 일부는 신흥청년회가 아닌 남면청년회라는 회명을 그대로 사용하며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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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해 웅동면 마천리 청년들을 중심으로 1920년대에 조직된 청년회. 1920년 웅동 청년회가 창립되어 지역 문화 향상에 노력하였으나 면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勢力)계급의 방해를 받아 웅동 청년회의 활동이 부진하던 차에 1925년 8월 1일 유학생 10여 명이 중심이 되어 웅동 면려 청년회에 합류하였다. 웅동 청년회는 조선 일보 진해 지국의 후원으로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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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해 웅천의 웅천 청년단을 개편해 조직된 청년회. 1924년 3월 27일 조성복, 주국녕, 문석주 등 5명이 중심이 되어 80여 명으로 웅천 청년단에서 웅천 청년회로 개편을 하였다. 당시 웅천 청년단의 주기철이 평양 신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어 청년단에서 청년회로 개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본 제국주의의 청년 운동에 대한 탄압이 날로 심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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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군 진해면에서 1925년 설립된 청년 운동 단체. 경남 창원군 진해면에서 1919년 창립한 진성회(進誠會)가 1925년 12월 13일 오전 11시 임시 총회를 개최하고 진해 제4 청년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학원을 설립하여 문맹 퇴치 운동을 하였다. 1926년 10월 31일 제2회 정기 총회에서는 회관 건축, 교양 문제, 재정 문제, 경남 사회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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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일제 강점기에 진해 지역 미혼 여성들로 구성된 비밀 결사 조직. 진해 처녀회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웅동적화비사(熊東赤化秘社)’를 통하여 진해 처녀회의 활동을 추정할 수 있다. ‘웅동 적화 비사’는 부산 경찰서 고등계에서 검거하여 조사 중인 소위 ‘진해 여공 적화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웅동에 있는 조맹규와 백태식 등이 부산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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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해 지역에서 활동했던 항일 청년 운동 단체. 1923년 4월 진해 청년 구락부가 정기 총회를 열어 진해 청년회로 개칭하였다. 1915년 진해 청년단을 출발로 해 1919년에는 대동 구락부와 통합하였고 1923년에는 진해 청년회가 되었다. 1923년 10월 13일 일본 토요야마 대학 졸업생 엄용식, 쥬오우 대학 졸업생 이영실을 초청하여 경화동 불교 포교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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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있던 여성 중심의 사회운동 단체.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청년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지역의 젊은 여성들은 창원 지역의 여성을 대상으로 사회적 교양을 쌓고 교육이나 훈련을 통하여 개개인의 인격을 완성하고자 여성 사회운동 단체인 창원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1926년 12월 19일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여 임시회를 개최하였으며, 집행위원으로 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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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있던 청년 중심의 사회운동 단체.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통일적인 조직을 결성하여 청년 대중의 정치적, 경제적, 민족적 이익의 획득과 생활의 향상을 꾀하고자 설립하였다. 또한, 조선 청년 대중의 의식과 교양 등을 철저히 훈련하고 조선 청년 대중의 장고한 조직의 완성을 기하고자 창원청년동맹을 설립하였다. 1928년 2월 7일 창원청년연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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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2월에 창립된 창원 청년 동맹의 진해 지부. 조선 청년 대중의 정치적, 경제적, 민족적 이익에 노력하여 생활의 향상을 기하고, 의식적 교양 및 훈련을 통해 청년 대중의 완성을 위해 조직되었다. 창원 청년 동맹은 1928년 2월 7일 창립하였고 창원 청년 동맹 진해 지부는 1928년 4월 1일 창립되었다. 창원 청년 동맹 진해 지부는 조직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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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있던 7개의 청년단체가 연합하여 결성한 사회운동 단체. 창원청년연맹에는 창원청년단(김한용·이주만), 남면청년회(안준), 소계 청년회, 진해청년회 등이 참가하였다. 진해청년회는 일찍이 남면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안준(安浚)과 교분이 있던 주병화(朱炳和)를 매개로 창원청년연맹에 쉽게 참가할 수 있었다. 1925년 4월 4일(음력)에 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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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에서 결성되었던 사회운동 단체. 창원청년단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지식을 고양시키고 체육 활동을 보급하며, 직업을 갖도록 하여 지덕체(智德體) 강화를 통하여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결성되었다. 창원청년단은 1920년 6월 27일 창원면 중동리의 김일현(金一鉉)·김정숙(金正淑)·황의성(黃義性)·설근헌(薛根憲)·황진환(黃臻煥) 등...
기타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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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있던 마산부 지역 신문 기자 단체. 1920년 일제가 식민 통치의 수단으로 ‘문화 통치’를 채택하면서 일제의 허락 하에 『조선 일보』·『동아 일보』 등 신문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대 초반에 지역 주재 기자들을 중심으로 경남 기자 동맹이 형성되었고, 곧이어 하부 조직으로 지역 단위의 기자단이 형성되었다. 마산 기자단이 신문지상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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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야구단 1920년대 김성두를 주축으로 구성 야구단이 조직되어 서울과 부산 등의 야구단을 초청하여 경기를 열었다. 이후 경제난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마산 운동계의 유지 김계호와 김종수의 도움으로 운동 기구를 사서 활동을 하였다. 구성 야구단은 야구 경기뿐만 아니라, 마산 지역에서 개최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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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경남 진해에서 학구적 생활과 신체 단련을 위해 조직된 청년 단체. 1921년부터 2년간 대정 학교[현 경화 초등학교] 출신 청년들로 구성되어 ‘구학(究學)’이라는 회지를 발간하면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구학회에서는 민족 사상의 고취와 민족적 역량을 쌓는다는 의미의 ‘구학(究學)’이라는 회지를 발간하였다. 1923년 8월 5일 경화동 공회당에서 우원도의 사회로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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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8월 17일 마산 지역에서 김명규, 김형선, 김상주, 김직성, 김기호, 황기룡이 모여 조직한 공산당 조직. 1924년 8월 17일 마산 지역에서 마산 공산당이 창립되었다. 당원이었던 김상주는 적기(赤旗)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1925년 7월과 8월 사이에 마산 공산당과 마산 공청을 조선 공산당 마산 야체이카, 고려 공청 마산 제1, 제2 야체이카로 개편하였다. 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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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마산에서 조선인 자본가들이 설립한 친일 단체. 1911년에 마산 경찰서장의 발기로 교풍회(矯風會)가 조직되었다. 이것이 전국 최초의 교풍회였다. 이 조직은 이후 경남 교풍회로 발전하고, 마산에는 1914년에 그 지부가 설립되었다. 한말 이후 교육과 계몽을 통해 마산의 근대화에 앞장서기도 하였지만 교풍회는 일제의 폭압이 드세었던 1910년대와 1930년대의 대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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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지역에서 ‘문화 운동’의 구심적인 역할을 한 청년과 노·장년층, 민족주의자와 친일적인 인물이 섞여 다양한 성격을 가진 단체. 1920년 6월에 마산 지역 문화 운동의 구심으로서 마산 구락부가 창립되었다. 마산 구락부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의 상징이었던 민의소(民議所) 건물을 회관으로 사용하고 민의소 대표였던 손덕우가 초대 회장이었다. 마산 구락부는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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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경상남도 마산 주민들이 자생적으로 조직한 사회 단체. 1899년 마산포 개항 이후 일본의 침탈에 맞서 상권 수호와 해안 매축권 확보 투쟁에 나섰던 마산[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 주민들의 저항 의식은 1908년 마산 민의소 설립으로 나타났다. 순수하게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권 옹호 자치 기구였던 마산 민의소는 마산 유일의 공회당 건물을 소유한 마산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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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5월 마산포의 객주들이 설립한 근대적 상업 단체. 1899년 마산항의 개항 이후 식민 자본으로부터 마산포의 상권을 보호하기 설립하였다. 1900년 5월 이규철(李圭哲)을 비롯한 마산포 시장 객주를 중심으로 마산 상호회를 조직하였다. 1908년 5월 30일 신마산 일본인 조차지에서 일본 상인 30명이 마산 상업 회의소를 설립하였다. 이를 계기로 마산 상호회는 1908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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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월 마산 지역에서 최초로 결성된 사회주의 사상 단체. 마산 지역의 사회 운동·노동 운동의 발전을 위해 결성되었다. 1923년 1월 마산 지역에서 사회주의 사상 단체인 마산 신인회가 만들어졌다. 1922년 11월 마산 지역에서 만들어진 사상 단체이고 신인회 구성원이 중심이 되어 1923년 8월에는 혜성사(彗星社)라는 사상 단체를 새로 조직하였다. 신인회는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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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마산 지역에서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무정부주의자. 1925년 김형윤을 중심으로 조한응, 김계홍 등이 조직하였다. 1927년 서울에서 김산이라는 무정부주의자가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외국인 선교사나 일제에서 벗어난 자주적인 독립교회 활동을 전개하면서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대중의 지지를 확보한 마산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창원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창원 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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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마산과 창원 지역에 산재해 있는 사회단체 간 연락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 1928년 신년 경상남도 마산과 창원의 각 사회단체 신년 간담회 석상에서 두 지역에 산재해 있는 마창 사회 단체의 연락을 위해 상설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28년 1월 4일 마산에서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다. 1928년 1월 31일 창원읍 청년회관에서 창립대회 및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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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마산 지역의 항일 민족 운동 연합 전선체. 마산에서는 1927년 7월 20일 신간회 마산 지회가 설립되었다. 1929년 12월 27일 제3회 정기 대회를 개최하려고 했으나 12월 23일 일제 경찰이 금지 명령을 내렸다. 1930년 1월 5일 신간회 마산 지회 집행 위원회를 열려고 마산 경찰서에 집회 계를 제출했으나 일제는 '연말 경계'란 구실로 집행 위원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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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창원 지역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통일전선체로서 결성된 단체. 1926년 11월 15일 정우회선언을 통해 방향전환론이 제기되면서 6·10만세 사건으로 위축된 사회운동은 새로운 활기를 되찾는다. 그 결과 1927년 2월 15일 비타협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통일전선체인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신간회는 창립 10개월 후인 1927년 12월 전국에 100여 개 지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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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해 웅천 지역 소년 소녀들로 구성된 단체. 1920년 8월 1일 웅천 지역 향교에서 웅천 소년단 창립 준비 위원회를 열고 8월 8일 웅천 보통학교[현 웅천 초등학교] 교정에서 웅천 소년단 결성 대회를 열었다. 민족정신 고취와 청소년들의 단합을 위해 체육회와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다. 소년 단가와 소녀 단가를 만들어 청소년들의 기상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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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항기 경상남도 마산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조직한 단체. 1899년 마산포 개항 당시 마산포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2, 3명에 불과하였지만, 각국 공동 조계 경매 이래 이주자가 점차 증가하여 다음 해인 1900년 봄에는 30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마산 거주 일본인들은 야마타[山田敎文]를 총대(總代)로 추대하고 평의원 3명을 선출하여 ‘마산 일본인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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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창원 지역 주민들에게 무산계급 이념을 선전·교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를 기점으로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한 항일운동은 종래 민족부르주아 중심의 항일운동이 지녔던 한계를 극복하고 일반 대중들을 자각시키면서 대중들의 실질적 권익신장을 보장하는 항일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처럼 민족부르주아 중심의 운동에서 무산계급 중심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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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비밀 결사 단체인 조선 국권 회복단의 경상남도 마산 지부. 1915년 1월 조직된 비밀 결사 단체인 조선 국권 회복단은 박상진, 윤상태, 서상권, 배중세, 이시영 등 영남 지역의 자산가·혁신 유림·지식인들이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안일암[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항일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조직의 목적은 단군을 받들고 신명을 바쳐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할 것과 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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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을 주축으로 한 천민 계급이 평등을 기치로 진주에서 조직했던 조선 형평사의 마산 분사(分社). 1924년 3월 6일 마산에서 조선 형평사 마산 지회인 마산 분사(分社)가 조직되었다. 1928년 3월 13일 경남 형평사 연맹 발기회를 가졌는데 마산 분사, 김해 분사, 창원 분사, 사천 분사, 진주 분사, 통영 분사, 부산 분사, 동래 분사, 밀양 분사가 발기 단체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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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창원에서 결성되었던 조선형평사 창원 분사. 형평사(衡平社)는 1920~1930년대에 걸쳐 백정들의 실질적 해방을 목적으로 활동한 전국적 조직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백정이라는 신분적 차별이 법률적으로 철폐되었으나 이후에도 실생활에서는 차별이 여전했다. 1922년 일본 관서 지방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1923년 4월 25일 진주의 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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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청년단과 대동 구락부가 통합하여 창립된 어용적 성격을 띤 단체. 1921년 4월에 진해 청년단과 대동 구락부가 통합되어 창립되었다. 진해 청년단의 단장 김병일(金秉一)과 대동 구락부 부장 홍수오(洪守五) 사임 후 두 단체의 의견을 모아 진해 구락부로 개칭하고 구자원(具子源)이 부장에 선출되었으며, 또 부무(部務)가 일층 확장되었다. 진해 청년단은 1915년 창립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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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진해 지역의 소년들의 사회 운동 참여를 위해 조직된 단체. 회원 20여 명으로 창립되었다.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어 성주사 진해 포교당[현 정암사]으로 사무실을 옮겨 명칭을 불교 소년회로 개칭하였다. 이후 종교 집회를 가장하여 활동을 계속하였지만 일본 경찰이 포교당의 잦은 집회를 구실로 포교당 주지에게 압력을 가해 포교당을 더는 집회 장소로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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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해 지역에서 1923년 소작료를 인하하고 관리자 횡포를 막기 위해 결성된 소작회. 지주가 소작권을 가질 수 없게 하고 고율의 소작료로 착취할 수 없게 대항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1923년 6월 18일 주병화(朱炳和), 문찬두(文酇斗), 김종건(金種健) 등이 발기인이 되어 불교 포교당[정암사]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다시 조직을 변경하여 종래 소작인만으로 조직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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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으로 한국이 식민지화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1907년 1월 말부터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한국의 산업가와 지식인들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1300만 엔에 달하는 일본 차관을 상환해야 하는데, 빈약한 정부재정으로는 그것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민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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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창원 지역에서 결성된 사회운동 단체. 창원동화합성회(昌原東華合成會)는 창원 지역에 산재해 있는 많은 소년 단체와 청년 단체들이 함께 수양을 통하여 합치 단결하여 사회에 실익을 주는 사업을 전개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1927년 9월 28일 창원청년회관에서 임시의장에 선출된 김치용(金致鏞)의 사회로 창원동화합성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후 창원동화합성회는 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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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창원 지역에 설립된 무정부주의자 비밀결사. 1928년 5월경 창원공립보통학교 훈도(訓導)로 재직하던 조영기(趙榮基)와 청년 손조동(孫助同) 외 몇몇 청년들이 독서구락부를 조직하여 사상에 관해 연구해 오다가 1928년 8월경 흑우연맹으로 변경한 뒤 부근의 청년들을 권유해 가맹시켰다. 이 후 마산경찰서에 조직이 발각되어 검거된 이후 취조하였으나 아무런 단서도 발견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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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신인회의 구성원이 중심이 되어 1923년 8월 새롭게 조직한 사상 단체. 사회주의 사상의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 한 주에 한 차례 모임을 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혜성사는 1923년 8월 조직되었고 1924년 8월 5일에 사각 동맹과 함께 ‘마산 공산 청년회’를 조직하였고, 1924년 8월 17일에 ‘마산 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조약·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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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장인 마산포 부근의 월영리, 자복포 일대에 일본의 단독 조계 설정을 허용하는 조약. 1899년 마산포의 개항을 전후하여 러시아는 남해안의 항구로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마산포에 동양함대를 위한 조차지를 설정하기 위해, 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 결과 마산포에는 다른 개항장에 없는 러시아와 일본의 단독 조계지가 설정되기도 했다. 먼저 러시아는 마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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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항기 개항장인 마산포 부근 율구미 일대 30만 평에 러시아의 단독 조계를 설정하도록 허용하는 계약. 1899년 마산포의 개항을 전후하여 러시아는 남해안의 항구로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마산포에 동양 함대를 위한 조차지를 설정하기 위해, 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 결과 마산포에는 다른 개항장에 없는 러시아와 일본의 단독 조계지가 설정되기도 했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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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인 1904년 2월에 마산포 주재 일본 영사관 소속 경찰을 조선인들이 습격한 사건. 개항기에 일어난 일본 경찰에 대한 조선인 습격사건이며, 조선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1904년 2월 마산포 주재 일본영사관 소속 경찰 경익태랑(境益太郞)이 낙동강 하류로 수렵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창원군 내서면 근처의 조선인 민가에 투숙했는데, 10여 명의 조선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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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식민지 교육 환경을 개혁하려는 민족교육운동 함안의 군북 공립 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김두영은 식민지 통치하의 교육환경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당시의 교육현실에 대해 “취학아동이 취학연령 아동의 불과 2할이고, 그나마 빈곤으로 퇴학하는 아동이 속출했으며, 혹 야학같은 것을 설치하고 교육하면 당국은 특별한 이유없이 폐쇄를 명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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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일본 제국주의 침탈에 대한 항쟁. 1899년 개항 당시 마산포에는 4곳의 선창[오산선창, 어선창, 백일세선창, 서성선창]을 중심으로 상가와 민가들이 모여 있는 정도였고, 선창의 자연조건에 따라 장소가 협소하고 수심도 얕아 상품의 하역과 선적에 불편함이 많았다. 이러한 불편을 개선하기 위해 동성리에 거주하는 김경덕(金敬悳)이 서성리에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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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진해 지역에서 일어난 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의 노동자 쟁의. 일제는 약탈 정책에 따라 양잠을 장려하고 누에 실을 뽑는 제사 공장 설립을 추진하였다. 1930년에 준공된 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은 그 중 하나로 한국인 공원들이 많았는데 노동 환경과 처우가 매우 열악했다. 이에 저항하여 남녀 공원들이 노동 쟁의를 일으켰다. 진해 공장 설립이 동양 주식회사 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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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마산 개항 이후 일본인이 마산에 세운 사립 일어 학교에 대한 마산항민들의 저항 운동. 1899년 마산항이 개항되면서 일본과 러시아는 마산항을 중심으로 토지를 매수하기 시작하였고, 마산포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토지매수 뿐만 아니라 구마산 시장권을 약탈하려고 하였다. 이에 마산항민들은 토지 불매 운동, 상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대일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인이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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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에 경상남도 마산부 구마산의 운송업 노동자들이 일본인 고용주에게 일으킨 동맹 파업. 1927년 3월 경성 철도국이 하나의 역에 하나의 사업체만 두겠다는 정책[일역 일점 주의(一驛 一店 主義)]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신마산, 구마산, 진영, 삼랑진역 등에서 운수업에 종사하던 한국인 업주[마산 선운 업주 조합]들은 이 정책이 자신들에게 파급될 악영향을 우려하여, 일본인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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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적인 탄압에 마산의 지식인과 노동자들이 결합하여 혁명적 노동조합을 결성해 노동 운동을 전개하려는 운동.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 제국주의는 대륙 침략 수행을 위해 조선을 병참 기지화하는 과정에서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은 핵심적 억압 대상이었다. 이전까지 합법적 노동운동, 개량적 노동운동도 금지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은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고 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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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기생집 주인의 학대에 저항한 기생들의 동맹 휴업 일제 강점기의 기생은 식민지라는 통치 제도와 근대 자본주의에 노출됨으로서 새로운 환경에 처하게 된다. 조선 시대까지 예악을 담당하고 사대부가의 여흥을 주도하였던 기생은 신분 해체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도 전통 가무악을 전승하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식민지 공창 정책의 대상자였던 창기와 비슷하게 통제되었다. 이처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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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마산 호신 학교에서 일어난 항일 학생 운동. 일제는 1905년 3월에 사학 취제법을 공포하여 한국인을 가르치는 모든 사립학교에 이 법을 적용했다. 그 취제 내용은 역사 지리 과목의 폐지, 성경 과목의 폐지, 각급 학교 교원의 국어[일어] 통달, 고등 보통학교 규칙의 준용 등으로 우리나라 사학의 대부분인 종교계 학교를 탄압하고 황국 신민화 교육을 강요했다.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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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시의 미녀 선발 대회 전신인 미녀 기생 선발 대회에 얽힌 일화. 1917년 초여름 지방 신문인 일문(日文) 남선일보사 주최로 마산 지역에 있는 현역 예기(藝妓) 인기투표 대회가 있었다. 이 대회는 투표로 결정하는 것으로 투표 용지는 관제엽서로 1인 1매로 제한하였다. 처음 발표에는 신마산에 있는 망월루(望月樓), 탄월(呑月) 등의 일본인 예기들이 후보자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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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마산 지역의 정기 장시인 마산포 구강장을 일본인 거류지로 옮기려는 일본 영사관과 일본 상인들의 시도를 막아내어 한국 상인들의 상권을 지킨 운동. 1899년 마산포 개항 당시 일본 상인들은 몇 사람 되지 않은데다가 자본도 영세하여 대부분 단순 잡화상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산으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면서 일본 영사관은 일본 상인들의 상권 확대를 돕기 위해 전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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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에서 전개된 농민조합 건설 운동. 상남면 농민조합건설운동은 일제의 경제적 착취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창원 지역에 지사를 설치함과 더불어 당시 창원면, 상남면, 웅남면 등의 토지 대부분을 약탈하는 등 경제적인 수탈이 심해지자 이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농민조합을 건설하기 위해 1927년에 일어난 운동이다. 창원 지역에 동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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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과 웅남면 농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동양척식주식회사 반대투쟁. 상남면민 동양척식회사 반대투쟁은 일제의 경제적 착취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창원에 지사를 설치함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소작인들에 대해 자행해 온 경제적 수탈과, 특히 1929년 가뭄으로 인한 수확량의 급격한 감소를 무시한 이전 그대로의 소작료 강제 징수에 항거하여 일어난 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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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마산만을 매립한 일. 개항을 계기로 마산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방대한 규모의 마산만 매립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일본인들에 의한 마산만의 매립은 도시의 전체적인 균형과 발전을 위해 거시적으로 일관되게 계획되어 시행된 것이 아니라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필요 및 투기성 경제 활동의 수단으로 시행된 매립이었다. 마산 도시가 끼고 있던 해안의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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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진해 지역에서 지주와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횡포에 맞서 소작 관계 개선과 농조 건설을 위한 농민 운동. 지나친 소작료의 징수 고리대의 악용 등 농민들은 늘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여기에 마름들의 농간과 그들에 의한 소작권의 빈번한 이동으로 소작 농민들의 삶이 매우 힘들어졌다. 이에 지주와 동척의 횡포에 맞서 소작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농민 조합의 건설이 필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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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마산포의 개항을 전후하여 단독 조계를 설정하기 위해 마산 자복포 일대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사들이려는 러시아와 일본의 요구를 거부한 사건. 1899년 마산포의 개항을 전후하여 러시아는 남해안의 항구로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마산포에 동양함대를 위한 조차지를 설정하기 위해, 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갈등을 빚고 있었다. 먼저 러시아는 마산포 개항 몇 개월 전부터 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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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석동 뒷산 마을 공유림을 둘러싼 석동 주민들의 항일 농민 운동. 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석동 뒷산에는 농우(農牛)의 목초지로 사용되는 마을 공유림이 있었다. 이 산림을 마산 부윤 미마쓰[三增久米吉]의 아들 쇼오고[詳吾]가 다년생 소나무를 벌목하고 과수원을 만들었다. 이에 석동 농민이었던 이장인 배효준을 비롯한 김시영, 우휘수 등이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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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 지역 농민들이 토지 수탈과 소작권에 대해 일으킨 저항 운동.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지역은 러일 전쟁 이후 1906년과 1907년에 일본의 해군 용지로 점탈되었다. 하지만 모든 토지가 군사 시설로 이용되지는 않았다. 일본 해군성은 그 남은 땅을 경작하도록 대여를 하였는데 일본인에게만 특혜를 주었다. 토지를 대여하게 된 일본인들은 농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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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해 지역의 수건 공장에서 발생한 노동 운동. 일제 강점기 진해의 여좌동에 있는 후쿠다 타월 공장에서 여자 노동자 절반 이상이 동시에 동맹 파업을 단행하였다. 공장주가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을 더 낮추겠다고 하여 동맹 파업을 발생케 하였다. 일제 강점기 진해 지역에는 ‘수건 공장’이 여좌동과 덕산동 두 곳에 있었다. 덕산동에는 공장주가 타나카인 ‘타나카 타월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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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에서 노동야학총동맹이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려다 일제에 발각된 사건. 1933년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지역의 각리에 산재한 노동야학 15개소의 야학 대표자와 교원이 북면노동야학총동맹의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이들은 공립보통학교의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기로 하였으며,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려다가 일제에 적발되었다. 북면노동야학총동맹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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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면민들이 전개한 일본인 군수에 대한 규탄 시위. 1910년부터 1918년까지 경상남도 내무부 및 제1부 도서기를 역임한 인물인 일본인 구찌이시[口石敬義]가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창원군수로 재직하면서 군민의 안전과 생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영리와 치적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농민들이 도청, 군청, 면사무소 등에 진정하는 등 강하게 항의하...
교육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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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 지역의 일제 강점기 초등 교육 기관 기능을 수행한 비정규 교육 기관. 일제 강점기 야학은 크게 농민 야학·노동 야학·여성 야학으로 나눌 수 있으며,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애국 계몽 운동·실력 양성 운동·자강 운동 등의 일환으로 설립되고 운영되었다. 야학은 일제 강점기 거의 전 계층의 지지와 참여가 있었던 대중 운동이었으며 192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빠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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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에 설립되었던 근대 교육 기관. 근대 교육 기관인 사립학교가 설립된 것은 국권 회복을 위한 민족적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민족 지도자들은 조선 사람들의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함양을 위하여 사립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는 등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사립학교는 민족 운동의 터전이 되었고, 민족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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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경상남도 마산 지역에 국내 최초로 설립되었던 비정규 교육 기관. 마산 노동 야학은 마산 지역 유지로서 민족 교육에 뜻을 품은 옥기환(玉麒煥)·구성전(具聖傳) 두 사람이 자금을 내고 명도석·김명규·나인환·팽삼진 등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우려하던 청년 지식인들이 교사로 참여하였다. 이후 마산 구락부가 마산 학원을 설립하여 경영을 맡으면서 마산 중앙 야학교로 명칭이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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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해 웅천 지역의 공립 보통학교. 1906년 설립되었던 사립 개통 학교가 경제난과 웅천 지역에 설치된 일제 헌병 파견대에 탄압으로 1915년 폐교되고 난 뒤, 1917년 설립된 공립 보통학교이다. 지금의 웅천 초등학교이다. 1906년 설립되었던 사립 개통 학교가 1915년 폐교되었고 1917년 4월 14일 웅천 공립 보통학교로 개교하였다. 사립 개통 학교가 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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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 이동에 있었던 비정규 학교. 정규 교육기관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으로 민족 교육이 어렵게 되자 야학교를 세워 일부 교사들이 비밀리에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교육을 하고 있었다. 정규 학교는 모집 인원의 제한, 수업료의 부담 등 제한이 있어서 다닐 수 없는 어린이가 많이 나타났다. 일찍이 통감 통치가 시작될 무렵부터 구국 운동의 목적으로 독지가들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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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창원시 진해에 설치된 최초의 해양 요원 양성 전문 교육 기관. 진해 고등 해원 양성소(鎭海高等海員養成所)는 전문 해양 요원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19년 진해에 설립된 진해 고등 해원 양성소는 한국에서 해양 요원을 양성하는 전문 교육 기관의 효시가 되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정부는 이 학교를 모델로 진해 고등 상선 학교를 세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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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마산 성호리(城湖里)에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학교. 영국령 오스트레일리아 미손회(會)의 파견 선교사 아담슨이 일찍이 본국에 청원하여 매달 금화 십 원의 보조를 받아 성호리 구 예배당[현 마산야학교] 사무실에 사숙(私塾)을 설치하고 학생 20여 인을 모집하여 이승규(李昇奎)가 숙장(塾長)으로 구학문을 가르쳤다. 1908년 7월 경성 정동 교회 고(故) 남승(南昇)을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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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창원 지역에서 가난한 아동들을 위해 만든 야학. 창원노동야학교는 창원 지역에서 보통학교에 취학하지 못한 가난한 아동들의 교육과 문맹 퇴치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창원청년단의 문화부 사업의 일환으로 1920년에 설립되었다. 1925년 경비 부족으로 운영난을 겪자 창원청년회 정기총회에서 회원들이 경비를 모을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에도 노동야학은 계속 재...
일본 군부대·군사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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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한국의 청소년을 태평양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1943년 진해에 설치한 해군지원병 훈련소.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제국주의 일본은 병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38년 ‘육군 특별 지원병령(陸軍特別志願兵令)’을 공포하여 한국 청년들을 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3년 5월 범위를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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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해에 있었던 일본의 해군 항공 부대. 제국주의 일본은 군사력을 확충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 해군 항공대의 증설을 계획하였으나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어렵게 되자 1924년 그중 하나를 진해에 설치하기로 했다. 이 계획에 따라 1936년 안곡동[현 해군 사관학교 자리]에 일본 해군 항공대가 들어섰다. 이곳은 이미 1909년에 진해 군항 예정지로 결정되어 가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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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필요한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1943년 진해에 설치한 해군 항공기 수리·정비 공장.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41년 하와이에 있는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함으로써 태평양으로 전쟁을 확대한 제국주의 일본은 중국·시베리아 방면의 군사력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군사 시설을 설치할 계획을 수립하고 대륙 전에 필요한 항공기의 제조, 수리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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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진해에 군항이 건설됨에 따라 주둔하였던 일본 해군 부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화하였고, 결국 1910년 한국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이미 러·일 전쟁 직후부터 한반도 남해안에 군항을 건설하려고 했던 일본은 진해를 군항 예정지로 선정하였다. 여러 사전 작업을 거친 끝에 191...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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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었던 일제 강점기 일본 신사. 일제가 조선을 무력으로 위압한 것이 경찰과 군대였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이 바로 신사(神社)였다. 원래 신사는 일본의 토착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참배하는 곳이었다. 이 토착 신앙을 신토(神道)라고 하는데, 일본인들의 악령에 대한 두려움과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참배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므로 신토는 뚜렷한 교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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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있었던 일제 강점기 일본 신사. 일제가 조선을 무력으로 위압한 것이 경찰과 군대였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이 바로 신사(神社)였다. 원래 신사는 일본의 토착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참배하는 곳이었다. 이 토착 신앙을 신토(神道)라고 하는데, 일본인들의 악령에 대한 두려움과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참배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므로 신토는 뚜렷한 교리도 없...